얼마만인가. 모처럼 도봉산에 오른다.
암벽을 탄답시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선인봉·만장봉·자운봉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함께 산을 타던 친구들끼리 ‘성모마리아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주봉도 변함없기는 마찬가지다. 달라졌다면 그 옛날 까까머리였던 내가 이제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고, 밧줄을 울러매는 대신 등산용 스틱을 짚었다는 사실뿐이다. 워낙 산을 좋아해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안 다녀 본 산이 없을 정도지만 도봉산을 찾은 것은 거의 몇십년 만이다. 아마도 내게 도봉산은 암벽을 타기 위해 찾는 산으로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학창 시절, 나는 참 활동적이었다. 앉아서 하는 일보다 뛰거나 땀을 흘리며 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취미 생활도 당연히 운동에 집중되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퍽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당신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처럼 장손인 내게도 말썽 없이 학교를 마치고 농사를 지으면서 조상 묘나 돌보며 살기를 요구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고 혈기가 넘쳤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법처럼 통하던 집안 분위기였지만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 마라.”
“왜 안 되죠?”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할 거예요!”
“이놈이 정말!”
음악 용어 중에 크레센도라는 게 있다. ‘점점 세게’를 표시하는 말인데 할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말을 꺼내면 내가 거기에 한 옥타브쯤 보태어 반발을 하고, 그런 내 모습이 노여워 언성을 높이시면 더 큰 목소리로 대드는 식이었다. 마침내 책상을 내리치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는 게 클라이맥스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할아버지가 내 뒤통수를 향해 목침을 내던지거나 몽둥이를 들고 쫓아 나오는 것은 마무리쯤 된다. 둘의 실랑이는 늘 이렇게 끝났다.
부딪치는 일은 할머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날엔 분명히 산에 가도 된다고 하시던 분이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당일엔 앞을 가로막고 못 가게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산에 다니는 일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려고 들면 사사건건 “안 된다”는 말부터 앞세우셨다.
돌아보면 당시의 할머니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요즘처럼 자식을 한둘만 낳아 고이 뒷바라지하는 것도 아니고 의료 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여럿을 낳아 그 중에 죽거나 잘못되는 경우도 많던 시절이었는데, 할머니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특히 내게 막내삼촌 되는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선천적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약시인 데다 몸도 허약해서 가족들의 애를 끓였다. 이런 막내아들이 안쓰러워 늘 안절부절못하던 할머니 눈에, 아무리 손자라지만 당신 아들보다 공부도 제법 하고 이리저리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좋아하며 운동한답시고 유도장에 들락거리고 산을 오르내리는 내가 고와 보일 리 없었을 테다. 더욱이 그런 삼촌과 내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은 연배였다는 것도 할머니의 속을 헤집어 놓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매사에 나의 행동거지와 당신의 막내아들을 견주고 비교했다. 말끝마다 “네 삼촌 좀 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내 귀에는 억지처럼 들려 가뜩이나 뒤틀린 심사를 더욱 꼬이게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하듯 할머니에게도 똑같이 대들었다. 할머니의 행동이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당돌했다.
암벽을 탄답시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선인봉·만장봉·자운봉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변함없이 그대로다. 함께 산을 타던 친구들끼리 ‘성모마리아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주봉도 변함없기는 마찬가지다. 달라졌다면 그 옛날 까까머리였던 내가 이제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고, 밧줄을 울러매는 대신 등산용 스틱을 짚었다는 사실뿐이다. 워낙 산을 좋아해서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안 다녀 본 산이 없을 정도지만 도봉산을 찾은 것은 거의 몇십년 만이다. 아마도 내게 도봉산은 암벽을 타기 위해 찾는 산으로 잠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학창 시절, 나는 참 활동적이었다. 앉아서 하는 일보다 뛰거나 땀을 흘리며 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취미 생활도 당연히 운동에 집중되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퍽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당신 아들에게 걸었던 기대처럼 장손인 내게도 말썽 없이 학교를 마치고 농사를 지으면서 조상 묘나 돌보며 살기를 요구하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뜻을 따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고 혈기가 넘쳤다.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한마디가 법처럼 통하던 집안 분위기였지만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하지 마라.”
“왜 안 되죠?”
“하지 말라면 하지 마!”
“할 거예요!”
“이놈이 정말!”
음악 용어 중에 크레센도라는 게 있다. ‘점점 세게’를 표시하는 말인데 할아버지와 나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말을 꺼내면 내가 거기에 한 옥타브쯤 보태어 반발을 하고, 그런 내 모습이 노여워 언성을 높이시면 더 큰 목소리로 대드는 식이었다. 마침내 책상을 내리치거나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오는 게 클라이맥스라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할아버지가 내 뒤통수를 향해 목침을 내던지거나 몽둥이를 들고 쫓아 나오는 것은 마무리쯤 된다. 둘의 실랑이는 늘 이렇게 끝났다.
부딪치는 일은 할머니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날엔 분명히 산에 가도 된다고 하시던 분이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당일엔 앞을 가로막고 못 가게 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산에 다니는 일뿐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려고 들면 사사건건 “안 된다”는 말부터 앞세우셨다.
돌아보면 당시의 할머니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요즘처럼 자식을 한둘만 낳아 고이 뒷바라지하는 것도 아니고 의료 기술이 발달한 것도 아니어서 여럿을 낳아 그 중에 죽거나 잘못되는 경우도 많던 시절이었는데, 할머니도 그런 경우에 해당했다. 특히 내게 막내삼촌 되는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선천적으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약시인 데다 몸도 허약해서 가족들의 애를 끓였다. 이런 막내아들이 안쓰러워 늘 안절부절못하던 할머니 눈에, 아무리 손자라지만 당신 아들보다 공부도 제법 하고 이리저리 친구들과 몰려다니기 좋아하며 운동한답시고 유도장에 들락거리고 산을 오르내리는 내가 고와 보일 리 없었을 테다. 더욱이 그런 삼촌과 내가 나이 차이가 그리 많지 않은 연배였다는 것도 할머니의 속을 헤집어 놓은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매사에 나의 행동거지와 당신의 막내아들을 견주고 비교했다. 말끝마다 “네 삼촌 좀 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는데, 내 귀에는 억지처럼 들려 가뜩이나 뒤틀린 심사를 더욱 꼬이게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에게 하듯 할머니에게도 똑같이 대들었다. 할머니의 행동이나 말을 가슴으로 이해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당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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