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는 스무 날 내내 납작보리도 아닌 통보리로 지은 밥과 된장에 풋고추가 전부였다. 처음 며칠은 사명감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고된 노동 뒤에 먹는 밥이어서 그랬던지 꿀맛도 그런 꿀맛이 없었지만, 좋은 노래도 하루 이틀이라고 열흘을 넘어 스무 날 동안 똑같이 나오는 식사는 어린 우리들을 힘들게 했다. 그래서 읍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누군가가 찐빵이라도 사올라치면 아귀다툼을 방불케 하는 전쟁이 일어났다. 형도 없고 동생도 없었다. 팔을 길게 뻗어 하나라도 더 움켜쥐는 쪽이 임자였다. 서울에서야 있으면 먹고 없어도 그만이었을 찐빵이 통보리밥에 된장과 풋고추만 대하던 우리에겐 최고로 귀하고 맛있는 먹거리 대접을 받은 것이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읍내에 나왔을 때였던 것 같다. 밥상 위에 오른 흰쌀밥을 보고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슬고슬한 밥. 통보리를 씹는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맛.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뚝딱 해치웠고, 순식간에 사라진 밥알이 너무나 아쉬워서 사발을 박박 긁었던 생각도 난다.
나는 지금도 밥이든 음식이든 남기는 법이 없다. 그것은 한 톨이라도 남기면 “쌀 한 톨은 농민의 땀 한 방울이다”며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시던 할아버지 덕도 있지만 그때 통보리로 지은 밥을 물리도록 먹으면서 그리워하던 흰쌀밥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계몽 활동 기간에 내가 맡은 역할은 틈틈이 신문을 만들어 돌리는 일이었다. 기자를 꿈꾸던 때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어찌하다 보니 그 일이 내게 맡겨졌다. 그날그날의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로 쓰고 만들어진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니까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취재며 배달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 삼척 노곡면에는 일곱 개 마을이 있어서 취재와 배달을 하려면 하루에 대부분의 마을을 다 누벼야 했다. 요즘처럼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산길을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나갔다.
하루는 동네 어르신이 주신 감자를 먹으며 재미난 얘기를 듣다가 밤이 늦어서야 본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워낙 산골이라 갈가지(살쾡이 또는 칡범의 현지 사투리) 같은 짐승이 자주 나타난다고 주신 관솔불을 들고 10리가 넘는 산길을 걸으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에 오싹오싹 놀라기도 했다. 가슴 가득 뿌듯이 차오르는 보람만이 금세라도 쓰러지려는 나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거구나.’
계몽 활동을 경험하던 즈음의 나는 정말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농과대학을 나와서 시골에 들어가 흙투성이 농민들과 살 맞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곤 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두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의 삶을 따라 산다는 건 얼마나 보람 있고 뿌듯할 것인가 떠올리면서……. 지금은 비록 프로스트의 시 제목처럼 ‘가지 않은 길’이 된 꿈이지만 이런 꿈을 품고 걷던 그 시골길의 흙냄새를 생각하면 가슴이 마냥 따뜻해 온다.
돌아보면 무겁고 억눌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어도 그나마 각박하지 않고 풍요로운 정서를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주변에 자연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원서동과 화동, 그리고 피난을 끝내고 돌아와서 둥지를 틀었던 청운동은 늘 인왕산이나 북악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철마다 피는 앵두꽃이며 사과꽃을 따러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메뚜기며 잠자리를 쫓아 산을 누비던 어린 날의 환경이 내 정서의 바탕이라면, 꽁보리밥으로 스무 날의 배를 채우며 농민들과 함께 땀을 나누던 그 시절의 추억은 바탕을 수놓은 아름다운 무늬쯤 될 것이다. 역시 자연만한 스승은 없다.
모든 활동이 끝나고 읍내에 나왔을 때였던 것 같다. 밥상 위에 오른 흰쌀밥을 보고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기름이 좔좔 흐르는 고슬고슬한 밥. 통보리를 씹는 맛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달콤한 맛.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뚝딱 해치웠고, 순식간에 사라진 밥알이 너무나 아쉬워서 사발을 박박 긁었던 생각도 난다.
나는 지금도 밥이든 음식이든 남기는 법이 없다. 그것은 한 톨이라도 남기면 “쌀 한 톨은 농민의 땀 한 방울이다”며 추상같은 불호령을 내리시던 할아버지 덕도 있지만 그때 통보리로 지은 밥을 물리도록 먹으면서 그리워하던 흰쌀밥에 대한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계몽 활동 기간에 내가 맡은 역할은 틈틈이 신문을 만들어 돌리는 일이었다. 기자를 꿈꾸던 때도 아니었는데 나중에 그렇게 되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 어찌하다 보니 그 일이 내게 맡겨졌다. 그날그날의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로 쓰고 만들어진 신문을 배달하는 일이니까 언뜻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취재며 배달이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당시 삼척 노곡면에는 일곱 개 마을이 있어서 취재와 배달을 하려면 하루에 대부분의 마을을 다 누벼야 했다. 요즘처럼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산길을 따라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나갔다.
하루는 동네 어르신이 주신 감자를 먹으며 재미난 얘기를 듣다가 밤이 늦어서야 본부로 돌아오게 되었다. 워낙 산골이라 갈가지(살쾡이 또는 칡범의 현지 사투리) 같은 짐승이 자주 나타난다고 주신 관솔불을 들고 10리가 넘는 산길을 걸으면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산짐승 소리에 오싹오싹 놀라기도 했다. 가슴 가득 뿌듯이 차오르는 보람만이 금세라도 쓰러지려는 나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거구나.’
계몽 활동을 경험하던 즈음의 나는 정말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농과대학을 나와서 시골에 들어가 흙투성이 농민들과 살 맞대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곤 했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두 주인공 채영신과 박동혁의 삶을 따라 산다는 건 얼마나 보람 있고 뿌듯할 것인가 떠올리면서……. 지금은 비록 프로스트의 시 제목처럼 ‘가지 않은 길’이 된 꿈이지만 이런 꿈을 품고 걷던 그 시골길의 흙냄새를 생각하면 가슴이 마냥 따뜻해 온다.
돌아보면 무겁고 억눌린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어도 그나마 각박하지 않고 풍요로운 정서를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주변에 자연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원서동과 화동, 그리고 피난을 끝내고 돌아와서 둥지를 틀었던 청운동은 늘 인왕산이나 북악산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철마다 피는 앵두꽃이며 사과꽃을 따러 사방을 헤집고 다니고, 메뚜기며 잠자리를 쫓아 산을 누비던 어린 날의 환경이 내 정서의 바탕이라면, 꽁보리밥으로 스무 날의 배를 채우며 농민들과 함께 땀을 나누던 그 시절의 추억은 바탕을 수놓은 아름다운 무늬쯤 될 것이다. 역시 자연만한 스승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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