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동 벌집촌, 역사 속으로 묻다

    기고 / 시민일보 / 2006-11-02 17:32:08
    • 카카오톡 보내기
    양대웅(구로구청장)
    재작년 10월25일은 구로공단과 역사를 함께 했던 벌집이 사라진 의미 있는 하루였다.

    구로동에 밀집한 2.5평 혹은 4평 정도의 간이주택과 구호주택, 아침이면 볼일을 보기 위해 공중화장실에 줄을 지어서서 진풍경을 연출하던 바로 이곳,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이 고작인 이 주택이 벌집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여 일명 벌집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런 벌집이 구로3동에만 1,300여 동이 있었다. 처음엔 청계천과 흑석동 등지의 도시계획 철거민들의 이주단지로 형성되었다가, 구로공단이 번창하면서 공단의 산업역군들의 안식처로 이용되기도 했었다. 공단이 한국 수출산업의 메카로 한창 노동을 필요로 할 때에는 이곳은 싼 방세로 거주하면서 시골에 돈을 부쳐야하는 우리네 여공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이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공단은 기술집약적 벤처산업이 줄줄이 입점하면서 첨단 산업단지로 탈바꿈하고 있었으며, 그 많은 공단 근로자들은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는 공장을 따라 떠나고 벌집은 막 노동을 하는 사람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면서 우범지대로 변해 청소년들의 탈선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필자가 구청장으로 취임하고부터 줄곧 외친 것이 우리 구로를 과거 공단의 칙칙한 이미지를 완전히 벗고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구로공단에 첨단 벤처산업이 줄줄이 입점하는 등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변하고 공단주변은 역세권 특화개발로 과거의 공단 이미지를 확 걷어내고 있다. 하지만 공단주변에 벌집같이 대형화재 우려와 도시미관을 해지는 골칫거리가 있는 한 구로가 변화고 있다고 장담할 용기가 결코 없었다. 해서 공단주변의 이런 벌집에 대한 재개발에 무게를 실었고, 그래서 적극 추진한 것이 구로제7·8구역의 재개발 착공인 것이다.

    벌집이 사라지고 지금 그 땅엔 고층 아파트의 꿈이 무르익고 있다. 오늘의 결실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공단 주변 구로동은 본래 국유지 위에 공영주택을 건립함으로써 생성된 곳임으로, 국유지에 대한 변상금과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주거환경개선이니, 재개발이니 하면서 우왕좌왕거렸던 것이 엊그제의 일이다.
    이제 이곳은 서울에서 제일 낙후된 대명사로의 벌집촌이 아니라, 19층에서 21층 높이의 16개동 고층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60~70년대 한국수출산업을 이끈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을 담은 벌집을 역사 속으로 묻고 그 위에 우뚝 솟은 이 아파트 단지는 말할 것이다. 이곳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IT강국, 첨단 한국이 있게 되었다고…….

    필자는 오늘 이런 글귀를 노트에 새기고 싶다. ‘역사는 단지 묻힐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하얀 종이 위로 공단 여공들의 아픈 삶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스친다. 구로는 이런 역사가 있기에 더욱 아름답고 성장이 더욱 빛난다. 그리고 오늘의 성장 저력은 바로 이런 곳에서 나온다고 생각된다.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공직생활에서 얻는 모든 노하우를 민선 구청장으로서 이곳 구로에 쏟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알아준 구민께 고맙고 감사하다.

    여생에 있어 일이 없어 허송하는 노인이었다면 이 얼마나 쓸쓸하고 고단하며 허무했을까.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