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 GP 내무반에서 일어난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시신이 안치된 국군수도병원을 다녀왔다. 금쪽같은 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와 실신한 듯 초점 없는 눈동자로 먼 하늘만 응시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적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도 아니요 아무 일도 모른 채 잠을 자다가 던져진 수류탄과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생명을 잃었으니 어느 부모가 기막히지 않을 수 있을까. 빈소에 나란히 놓인 사진 속 여덟 젊은이들과눈길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아무리 오래 전이라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구타와 기합은 일상사여서 엉덩이에 몽둥이를 매달고 살았다.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에 든 후에도 은근히 불러일으켜 교육을 시킨다며 기합을 주고 구타를 했다. 조금 과장하면 맞지 않고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격모독도 심했다. 그래서 가끔씩 용기 있는 동료들이 선임병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자신과 동료를 철저히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논산에서 훈련받을 때의 일이다. 식사가 끝나고 식판을 닦으라는데 물조차 주지 않았다. 휴지가 있을 리도 만무하니 혀로 닦을 수밖에 없었는데 식판을 본 소대장이 밥풀 하나가 남았다며 내무반 한가운데 세워 놓고 이를 악물라고 하더니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50대를 큰 소리로 세어 가며 맞았다. 엄살을 피우며 볼을 감싸면서 나뒹굴었다면 중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 안이 터져 피가 튀어 오르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꼿꼿하게 서서 끝까지 버텼다. 맞을수록 이빨을 더 앙다물고 눈도 더 크게 뜨고 얼굴도 더 바짝 들이밀었다. 때릴 테면 때려 보라는 투였다.
맞는 이유가 하도 어이없고 억울해서 솔직히 ‘이놈을 확 밟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고 온 애인과 내 미래가 머리 속에 빤히 그려지니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쉰 대를 때리고는 지쳤는지 “지독한 놈”이라며 가서 피나 씻으란다. 오기로 끝까지 꼿꼿하게 버틴 나도 지독한 놈이지만 배식판에 붙은 밥풀 하나로 그만큼을 때린 놈도 지독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수십 년 전 군대와 지금 군대를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잘 안다. 요즘 군대는 구타와 기합이 눈에 띄게 줄었거나 아예 없어진 곳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남북 관계에 주적 개념이 없어지고 그래서 장병들의 사기가 느슨해졌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인내심 적은 게 요즘 신세대의 성향 때문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내 이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고가 관련된 사람 몇몇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군대의 문제다. 나라를 지키는 병역이 아무리 국민의 의무라지만 이런 군대에 마음놓고 자식을 보낼 부모가 얼마나 될까. 정부의 신뢰도 무너졌고 국가의 신뢰도 무너졌다. 그 나라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내 신뢰도 더불어 무너졌다. 조각난 신뢰가 너무도 무참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두 번 눈물을 흘렸다. 식판에 남은 밥풀 하나 때문에 무참히도 얻어터지던 날 억울해서 운 것이 첫 번째요, 순전히 분단의 희생양으로 제 목숨을 끊은 한 젊은이의 주검 앞에서 운 것이 두 번째다.
내가 제대 말년에 근무를 한 곳은 지금은 없어진 부대였는데 귀순자나 체포한 간첩을 통해 북한의 각종 군사 자료를 얻어내는 곳이었다. 이미 보안사와 정보부의 각종 조사를 거친 후에야 그곳에 오게 된 간첩들이라서 조사도 아닌 면담 정도만으로도 각종 보고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수용된 그들을 돌보는 일종의 간수 역할을 했는데 어쩌다가 그들과 한방에 마주 앉을 때면 은근히 겁도 나곤 했다.
아무리 오래 전이라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에도 구타와 기합은 일상사여서 엉덩이에 몽둥이를 매달고 살았다. 점호가 끝나고 잠자리에 든 후에도 은근히 불러일으켜 교육을 시킨다며 기합을 주고 구타를 했다. 조금 과장하면 맞지 않고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인격모독도 심했다. 그래서 가끔씩 용기 있는 동료들이 선임병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까지 자신과 동료를 철저히 파괴하는 행위는 하지 않았다.
논산에서 훈련받을 때의 일이다. 식사가 끝나고 식판을 닦으라는데 물조차 주지 않았다. 휴지가 있을 리도 만무하니 혀로 닦을 수밖에 없었는데 식판을 본 소대장이 밥풀 하나가 남았다며 내무반 한가운데 세워 놓고 이를 악물라고 하더니 주먹으로 치기 시작했다. 50대를 큰 소리로 세어 가며 맞았다. 엄살을 피우며 볼을 감싸면서 나뒹굴었다면 중간에 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입 안이 터져 피가 튀어 오르는데도 자존심 때문에 꼿꼿하게 서서 끝까지 버텼다. 맞을수록 이빨을 더 앙다물고 눈도 더 크게 뜨고 얼굴도 더 바짝 들이밀었다. 때릴 테면 때려 보라는 투였다.
맞는 이유가 하도 어이없고 억울해서 솔직히 ‘이놈을 확 밟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곧바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두고 온 애인과 내 미래가 머리 속에 빤히 그려지니 참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쉰 대를 때리고는 지쳤는지 “지독한 놈”이라며 가서 피나 씻으란다. 오기로 끝까지 꼿꼿하게 버틴 나도 지독한 놈이지만 배식판에 붙은 밥풀 하나로 그만큼을 때린 놈도 지독하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수십 년 전 군대와 지금 군대를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은 잘 안다. 요즘 군대는 구타와 기합이 눈에 띄게 줄었거나 아예 없어진 곳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리 남북 관계에 주적 개념이 없어지고 그래서 장병들의 사기가 느슨해졌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감성적이고 충동적이어서 인내심 적은 게 요즘 신세대의 성향 때문이라고 이해하려 해도 내 이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번 사고가 관련된 사람 몇몇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군대의 문제다. 나라를 지키는 병역이 아무리 국민의 의무라지만 이런 군대에 마음놓고 자식을 보낼 부모가 얼마나 될까. 정부의 신뢰도 무너졌고 국가의 신뢰도 무너졌다. 그 나라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내 신뢰도 더불어 무너졌다. 조각난 신뢰가 너무도 무참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두 번 눈물을 흘렸다. 식판에 남은 밥풀 하나 때문에 무참히도 얻어터지던 날 억울해서 운 것이 첫 번째요, 순전히 분단의 희생양으로 제 목숨을 끊은 한 젊은이의 주검 앞에서 운 것이 두 번째다.
내가 제대 말년에 근무를 한 곳은 지금은 없어진 부대였는데 귀순자나 체포한 간첩을 통해 북한의 각종 군사 자료를 얻어내는 곳이었다. 이미 보안사와 정보부의 각종 조사를 거친 후에야 그곳에 오게 된 간첩들이라서 조사도 아닌 면담 정도만으로도 각종 보고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수용된 그들을 돌보는 일종의 간수 역할을 했는데 어쩌다가 그들과 한방에 마주 앉을 때면 은근히 겁도 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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