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조 사건이 난 이듬해, 이른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때 생포되었던 간첩들 몇이 우리 부대로 오게 되었다. 그 중에 함경도 북청 출신의 스물예닐곱 먹은 젊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우리 부대로 옮겨 오기 전에 이미 전향을 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북한에서 교육을 받을 때는 남조선에는 다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뿐이고 서울은 쓰레기장과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서 백화점도 구경하고 시내도 돌아다니다 보니 김일성의 말이 몽땅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내가 근무를 서는 날이면 빵 한 조각이라도 들고 그가 수용된 방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사이여서 나중에는 정이 듬뿍 들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살을 했다. 청소를 할 때 쓰는 걸레에서 빠지는 실을 한 올 두 올 모아 두었다가 그것으로 끈을 꼬아서 목을 매단 것이다. 지급되는 치약을 소설 ‘삼국지’의 검정색 표지에 곱게 펴 바르고는 그곳에 뾰족한 것으로 글씨를 써서 유서도 남겼다. “부모님 불효한 것을 용서하옵소서. 누이야 이 오빠는 먼저 간다”로 시작되는 유서는 “김일성 일당에게 저주 있기를! 대한민국 만세!”로 끝을 맺었다.
충격적이었다. 아무도 괴롭힌 사람이 없었으니 아마도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랬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념이 무엇이고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토록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돼야 하는지 안타까움이 앞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급기야는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목숨까지 끊어야 하는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시신을 묻어 줘야 하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왠지 내가 해야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을 하면 너한테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덕을 쌓는 일이라며 내무반 후배 한 명을 설득해 함께 하기로 하고 그날 저녁 조문 하나를 지었다.
장교 한 사람과 부대에서 일을 하던 민간인 문관, 그리고 나와 후배가 장례를 치렀다. 풍수는 모르지만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쪽에 터를 잡고 초겨울의 언 땅을 곡괭이로 파서 묻어 주었다. 술이랑 북어도 챙겨 가서 제수를 차리고 조문을 읽었다.
“자네 잘 가게. 편히 쉬게나. 아무도 자네를 얽맬 수 없는 그곳에서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이렇게 시작하는 조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으로 희생된 젊은 주검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발길을 돌렸다. 전쟁과 피난 이후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분단을 확인했다.
그날 내무반 한구석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쉼 없이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그 옛날 도봉산 선인봉에 밧줄을 걸고 매달려 답답하고 눌린 가슴을 풀기 위해 불던 하모니카 소리가 다시금 재연되는 듯했다.
지난 2003년 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6·25 때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작은고모를 금강산 온정각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날 행사에 함께 참가한 100가족을 통해 그들이 하나같이 다양한 사연과 다양한 아픔을 간직한 채 반백년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분단으로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무반 총기 사고도 분단의 산물이요, 제 피붙이를 먼 타향에 두고 목을 매달아야 했던 젊은이도 분단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반세기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그런데 막상 서울에 와서 백화점도 구경하고 시내도 돌아다니다 보니 김일성의 말이 몽땅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내가 근무를 서는 날이면 빵 한 조각이라도 들고 그가 수용된 방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사이여서 나중에는 정이 듬뿍 들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살을 했다. 청소를 할 때 쓰는 걸레에서 빠지는 실을 한 올 두 올 모아 두었다가 그것으로 끈을 꼬아서 목을 매단 것이다. 지급되는 치약을 소설 ‘삼국지’의 검정색 표지에 곱게 펴 바르고는 그곳에 뾰족한 것으로 글씨를 써서 유서도 남겼다. “부모님 불효한 것을 용서하옵소서. 누이야 이 오빠는 먼저 간다”로 시작되는 유서는 “김일성 일당에게 저주 있기를! 대한민국 만세!”로 끝을 맺었다.
충격적이었다. 아무도 괴롭힌 사람이 없었으니 아마도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그랬을지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념이 무엇이고 얼마나 중요하기에 이토록 꽃다운 젊은 목숨들이 그 틈바구니에서 희생돼야 하는지 안타까움이 앞섰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고 급기야는 피붙이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목숨까지 끊어야 하는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시신을 묻어 줘야 하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건 왠지 내가 해야 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일을 하면 너한테 뿐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덕을 쌓는 일이라며 내무반 후배 한 명을 설득해 함께 하기로 하고 그날 저녁 조문 하나를 지었다.
장교 한 사람과 부대에서 일을 하던 민간인 문관, 그리고 나와 후배가 장례를 치렀다. 풍수는 모르지만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쪽에 터를 잡고 초겨울의 언 땅을 곡괭이로 파서 묻어 주었다. 술이랑 북어도 챙겨 가서 제수를 차리고 조문을 읽었다.
“자네 잘 가게. 편히 쉬게나. 아무도 자네를 얽맬 수 없는 그곳에서 이제는 편히 눈을 감게나…….”
이렇게 시작하는 조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분단의 아픔으로 희생된 젊은 주검 앞에서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발길을 돌렸다. 전쟁과 피난 이후 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분단을 확인했다.
그날 내무반 한구석에 앉아서 하모니카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쉼 없이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그 옛날 도봉산 선인봉에 밧줄을 걸고 매달려 답답하고 눌린 가슴을 풀기 위해 불던 하모니카 소리가 다시금 재연되는 듯했다.
지난 2003년 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6·25 때 서울대병원에 근무하다가 행방불명이 된 작은고모를 금강산 온정각에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날 행사에 함께 참가한 100가족을 통해 그들이 하나같이 다양한 사연과 다양한 아픔을 간직한 채 반백년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분단으로 눈물 흘리는 모든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내무반 총기 사고도 분단의 산물이요, 제 피붙이를 먼 타향에 두고 목을 매달아야 했던 젊은이도 분단의 산물이다. 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반세기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민의 눈물을 닦아 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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