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도(先遷都) 후궁궐(後宮闕)

    기고 / 시민일보 / 2006-11-15 16: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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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노근(노원구청장)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조성을 관장할 행정기구로 신궁궐조성도감(新宮闕造成圖鑑)을 설치하였는데 그때가 1394년(태조 3년) 9월이다. 그리고 곧바로 정도전?권중화 등을 남경(한양)의 북악산 궁궐부지로 보내서 궁궐(宮闕)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그리고 시전(市廛)과 도로 등 구체적 위치를 구상하게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현재 서울의 골격(骨格)이다.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사업은 순조롭게 추진되었을까? 그러하질 못했다. 태조 이성계의 뒤를 이은 정종(재위:1399년~1400년)이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게 된 거다. 그렇다면 정종은 왜 그의 부왕(父王) 태조 이성계가 엄청나게 공(功)을 들여 추진한 한양천도를 굳이 취소하고 환도해야 했을까?

    “그러나 태조 이성계가 한양천도를 끝내고 도성(都城)수축이 끝나갈 무렵이죠… 그때 갑자기 변란이 생긴 거지요… 세자(世子) 문제를 두고 방원이 난을 일으켜… 거기서 초봉세자(初俸世子) 방석과 그를 추종하던 정도전·남곤 등이 죽었어요.”

    그 골육상쟁(骨肉相爭)이 바로 ‘방원의 난’이라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이다.

    “결국 그 수습책으로 태조 이성계는 정종한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정국(政局)과 민심(民心)이 심상치 않게 돌아갔지요… 그때 서운관에서는 그 처방책으로 부랴부랴 피방(避方)할 것을 건의했어요… 그래서 정종은 환도문제를 조준 등 종척(宗戚)과 공신(功臣)들과 상의하여 송도(개경)로 환도한 거지요.”

    아무튼 그 정종의 개경환도 사업은 조선 초 네 번째 천도사업이었다. 그때가 1399년(정종 1년) 12월이다.
    하여간 당시의 환도정국(還都政局)이 얼마나 불안했는지는 무엇보다 서운관(書雲觀)의 상언(上言)이 증거하고 있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까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피방처(避方處)로 송도(松都:개경)가 좋지요… 다른 곳은 대소신료와 군사들이 묵을 곳이 없지요.”
    그렇다면 당시 백성들은 환도 결정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까?

    ‘애초부터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還都)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며 손에 손을 잡고 이고지고 하며 길에 연락부절하니 성문(城門)을 지키어 이를 제지하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환도 후 얼마 안 돼 정국상황이 또 다시 꼬여갔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방간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정국불안의 도화선이 됐다. 알다시피 그 변란의 원인은 차기에 과연 누가 왕에 오르느냐이다.

    “결국 정종은 1399년 11월에 왕위를 정안군(방원)에게 물려주지요… 송도로 환도한지 1년도 못 돼 서지요… 그가 바로 태종이지요…”

    그러나 태종이 등극한 후 한양 재천도 문제가 불거진 것은 아주 엉뚱한데서다.

    “방원이 태종으로 1401년 올랐는데… 불행히도 즉위 후 한 달도 안 돼 개경의 정궁 ·수창궁(壽昌宮)·에 불이 난거지요… 그러자 영사평부사 하륜, 정승(政丞) 김사형, 이무 등은 재천도 문제를 거론했어요… 결국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7월에 한양으로 천도하기에 이르지요.”

    그렇지만 태종은 재천도 문제가 조정신료 사이에 또다시 분열을 가져올 것을 우려했는지 신중을 기했다.

    세간(世間)에는 재천도 논쟁을 둘러싸고 그 억측이 무성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증거는 조선왕조실록 일거다. 그러나 천도정사(遷都正史)는 그 흥미가 덜할 터이니 가끔은 천도야화가 있어야 할 거다.
    먼저 천도후보지 격론이다. 무려 3개 후보지로 난립했다.

    ‘구도(舊都) 송도(개경)로 그대로 하느냐… 무악(毋岳:서대문구 안산)으로 하느냐… 아니면 한양으로 하느냐?’
    아무튼 재천도 문제는 그렇게 조정대신들 간에 의견이 표류했다.

    그 천도후보지(遷都候補地)는 세 갈래였다. 첫째는 그래도 송경(松京)만한 길지가 없다며 그냥 구도(舊都)에 있다는 주장, 둘째는 안산무악(鞍山毋岳:서대문구 안산)으로 하느냐, 셋째가 신도(新都) 한양(漢陽)으로 하느냐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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