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꿈과 희망은 늘 바뀐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공군사관학교를 다니던 집안 아저씨를 볼 때에는 파일럿이 되고 싶었고, 농촌 계몽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잠시나마 농민들과 함께 땀도 흘리고 문맹도 없애는 농촌운동가를 꿈꾸기도 했다.
꿈이라고 이름 붙이기보다는 어린 시절 훌륭한 사람을 본받고 싶었던 욕심이었다. 작은 것이라도 본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배워야 했기에 어른들 몰래 도장을 다니고 농촌봉사 활동도 따라다녔다. 그 꿈 중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운명론자이다. 그렇다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시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내 삶과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다.
통신사에 들어간 것도, 거기서 국민일보로 옮기게 된 것도, 또 방송국으로 바꿔 앵커라는 낯선 출발을 하게 된 것도 사실 무슨 계획을 가지고 진행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으로의 변신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줄곧 정치부 기자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던지, 얼굴이 알려진 방송사의 앵커라서 그랬던지 생각지도 않은 정치권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정치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던 때여서 그랬기도 하지만, 솔직히 국회의원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생활이 5년째로 접어들던 시기였는데,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방송인으로서 자기 시간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 너무도 힘들었다.
다시금 정치권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 거절할 때는 몰랐는데 두 번씩이나 영입 제안을 받고 보니 머리 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아내에게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이나 집안 어른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도 상의를 했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난 여름 휴가 길에서 나는 결심했다.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겨 보자고.
수도권에 사활을 건 중앙당이 그렇게 영입한 방송계의 인물은 나 말고 KBS의 박성범 씨, 이윤성씨 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입사 동기인 셈이다.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젠 출마 지역을 선택해야 했다. 중앙당에서는 영입 인사들을 위해 지구당위원장을 결정하지 않고 비워 놓은 지역들을 제시했다. 중앙당에서는 나를 후보로 가정해서 실시한 이 지역들의 여론조사 결과도 보여 주었는데, 그때까지도 앵커를 맡고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 어디에서든 현역 의원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나는 송파을 지역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내 선택에 대해 모두들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특히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위험한 선택이라고 극구 말렸다. 그때까지 송파의 어떤 지역에서도 여당이 단 한 번도 당선자를 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3대 때와 14대 때의 결과를 보면 송파갑에는 민주당의 김우석씨와 국민당의 조순환씨가, 송파을에서는 평민당과 민주당으로 출마했던 김종완씨가 연거푸 당선되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언론계 대선배인 최병렬 전 대표를 찾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의했다.
“왜 쉬운 데 놔두고 거기를 가려고 해. 차라리 전국구를 달라고 해. 일단 전국구 하고서 나중에 지역구로 옮기면 더 낫지 않겠어? 송파는 어려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충고에 잘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했으면 일단 최선을 다해 가고 그 결과는 늘 하늘에 맡겼다.
내 인생의 또 다른 막은 그렇게 올랐다.
꿈이라고 이름 붙이기보다는 어린 시절 훌륭한 사람을 본받고 싶었던 욕심이었다. 작은 것이라도 본받고 싶으면 어떻게든 배워야 했기에 어른들 몰래 도장을 다니고 농촌봉사 활동도 따라다녔다. 그 꿈 중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는 것 하나가 있다. 조용한 시골로 내려가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나는 우리 삶의 상당 부분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운명론자이다. 그렇다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지는 않았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시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내 삶과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다.
통신사에 들어간 것도, 거기서 국민일보로 옮기게 된 것도, 또 방송국으로 바꿔 앵커라는 낯선 출발을 하게 된 것도 사실 무슨 계획을 가지고 진행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으로의 변신도 마찬가지다.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줄곧 정치부 기자로 살아왔기 때문이었던지, 얼굴이 알려진 방송사의 앵커라서 그랬던지 생각지도 않은 정치권으로부터 영입 제의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다. 정치를 한다는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던 때여서 그랬기도 하지만, 솔직히 국회의원을 그리 대단하게 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즈음의 나는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방송국 생활이 5년째로 접어들던 시기였는데,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방송인으로서 자기 시간뿐만 아니라 가족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는 생활의 연속이 너무도 힘들었다.
다시금 정치권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 거절할 때는 몰랐는데 두 번씩이나 영입 제안을 받고 보니 머리 속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아내에게 진지하게 의견을 물었다.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이나 집안 어른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도 상의를 했다. 그리고 오대산으로 떠난 여름 휴가 길에서 나는 결심했다.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겨 보자고.
수도권에 사활을 건 중앙당이 그렇게 영입한 방송계의 인물은 나 말고 KBS의 박성범 씨, 이윤성씨 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일종의 입사 동기인 셈이다.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젠 출마 지역을 선택해야 했다. 중앙당에서는 영입 인사들을 위해 지구당위원장을 결정하지 않고 비워 놓은 지역들을 제시했다. 중앙당에서는 나를 후보로 가정해서 실시한 이 지역들의 여론조사 결과도 보여 주었는데, 그때까지도 앵커를 맡고 있던 때여서 그랬는지 어디에서든 현역 의원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었다. 나는 송파을 지역을 선택했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내 선택에 대해 모두들 걱정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특히 정치판 돌아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위험한 선택이라고 극구 말렸다. 그때까지 송파의 어떤 지역에서도 여당이 단 한 번도 당선자를 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3대 때와 14대 때의 결과를 보면 송파갑에는 민주당의 김우석씨와 국민당의 조순환씨가, 송파을에서는 평민당과 민주당으로 출마했던 김종완씨가 연거푸 당선되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언론계 대선배인 최병렬 전 대표를 찾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의했다.
“왜 쉬운 데 놔두고 거기를 가려고 해. 차라리 전국구를 달라고 해. 일단 전국구 하고서 나중에 지역구로 옮기면 더 낫지 않겠어? 송파는 어려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충고에 잘 알겠다고 대답은 했지만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정했으면 일단 최선을 다해 가고 그 결과는 늘 하늘에 맡겼다.
내 인생의 또 다른 막은 그렇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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