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 사나이(上)

    기고 / 시민일보 / 2006-11-29 16: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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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 맹형규 의원
    “이 사람들아, 서두르게.”
    김해 김씨 시제 현장에서 신한국당 의원들에게 JP는 선문답과도 같은 말을 던졌다. 해석을 하자면 더 이상 몽니 부리는 일은 없을 테니 어서 나를 데리고 가라는 뜻이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JP와 DJ가 손을 잡느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솔솔 나오고 있을 때라서, 이 말은 곧 DJ와 손을 잡지 않고 이회창 씨와 연합을 할 수 있다는 속내이기도 하고, 또 DJ와의 연합이 어느 정도 성사 단계에 와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같은 JP의 뜻은 분명 당에 전달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연합 없이도 승리한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공식적으로 DJP연합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이 연합은 결과적으로 신한국당이 그해 대선에 패배하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로서는 대선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날려 버린 셈이다.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될 무렵 나는 이회창 후보로부터 직접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경선 때까지만 해도 김덕룡 씨 편에서 전국 유세를 함께 다니고, 경선 전날도 대의원들이 묵은 여관을 밤새 돌며 선거운동을 했었기에 이회창 후보와는 좀 소원하게 지냈는데 뜻밖이었다. 그러나 경선을 통해 신한국당 후보로 결정된 바에는 못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또한 이미 김덕룡 씨 진영에 합류하면서 내가 내건 조건이 “경선 결과에 승복하라”는 것이었으니만큼 거리낄 것도 없었다. 수행특보로 본격적인 대선에 뛰어들었다.

    여당인 데다가 지지도도 탄탄해서 후보 주변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장 선거를 치러도 당선에 문제가 없을 만큼 기세도 당당했다. 그러나 두 아들의 병역 의혹 등이 불거지고 선거 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그 많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지지율이 11%까지 낮아졌다. 후보와 함께 호남을 방문했던 날, 곁에 남은 사람은 현지 위원장 몇몇과 나 혼자뿐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후보님, 다 도망가고 한 사람이 남는다면 제가 남아 있을 겁니다. 조금 지나면 다 잘 될 겁니다.”

    차 안에서 둘이 됐을 때 이회창 후보를 위로했다. 내 이런 위로가 고마웠는지 후보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맙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후보를 수행한 이날 호남 방문을 두고 기자들은 ‘의리의 사나이 맹형규’라는 제목을 달아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당에서조차 후보를 낙마시키자는 말까지 돌 지경이 되었다. 나도 참여하는 초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모임에서는 이회창 후보에게 직접 물러나라는 얘기를 하자는 말이 구체적으로 나오던 터여서, 전국을 돌면서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총대를 메고 나서서 후보 낙마를 논의하는 사람들을 만나 “전쟁 중에 장수를 갈면 어떻게 싸움을 치르나. 우리가 힘을 실어 주어도 모자라는 판에 뒤에서 딴지를 걸어서는 안 된다”며 설득에 나섰다.

    마침내 이 일은 초선 의원들의 의견이나 요구 사항을 후보에게 전달하는 선에서 합의하고서야 더 이상 후보 교체니 낙마니 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들의 표가 새나가는 데도 있었다. 이인제 씨는 경선에 불복하고 무소속으로라도 나갈 태세였고, 경선에서 탈락한 후보측 사람들은 이인제 씨 쪽으로 옮겨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나는 이회창 후보와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들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소통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그 노력이 막판의 큰 이탈을 막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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