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참 동안 영제교 난간의 천록석상(天祿石像)을 뚫어지도록 응시해봤다. ‘저 천록이 영물(靈物)이라는데… 혹시 저 석수가 이 길손을 궁궐 침범자(侵犯者)로 심판을 하지 않을까?’ 정말 땀나는 일이다.
조심조심 그 천록의 거동(擧動)을 살피면서 영제교를 무사히 건넜다. 아무튼 나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영제교 석수(石獸)들이 결코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거기에는 그런 놀라운 메세지(Message)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이제부터는 궐문 안으로 들어 왔으니 우선 그 답사 루트(route)부터 알아봐야겠다.
궐내의 답사 루트는 아무래도 ‘흥례문’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미 수백 명의 답사객들이 흥례문 앞마당에 붐비고 있었다.
일본 관광단은 관광 가이드의 붉은 깃발 아래 대오(隊伍)를 지어 다니는데 그들의 행동거지는 어딘가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색깔을 벗지 못한 것 같았다. ‘과연 그 사람들은 지금 경복궁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한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植民地)였다는 우쭐함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속죄(贖罪)하는 양심일까?’
마침 때가 삼일절(三一節)을 전후한 시점인지라 별 생각이 다 든다.
그 일본인들을 목격한 영감은 어느새 표정이 굳어져 갔다.
“지금! 바로 이 자리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어요…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청사가 있었던 곳이고요.”
그 강론을 듣고 있으려니 일본 제국주의 망령(妄靈)이 어른거렸다.
“그 자들은 총칼로 조선을 멸망시키더니… 망치로 흥례문(興禮門)을 난도질하여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어요… 다행히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았을 때 그걸 철거하고… 그리고 흥례문을 다시 복원하였으니… 정말 일제청산의 대작업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영감은 갑자기 아주 못마땅한 인상을 지었다.
“글쎄 저기 저… 금천하상(禁川河上)에 깐 바닥석이나 영제교 난간석을 잘 봐요… 저걸 누가 원형대로 복원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어찌 석재(石材)들을 저렇게 매끈하게 다듬을 수 있을까요?… 아마 기계 등으로 정확히 자르고 망치 다듬질로 매끈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건 장식이지 복원이라 말할 수 없잖아요?… 아마 ‘덤벙석(징검다리석)’이 골고루 깔려 있었을 거요.”
하여간 그 질감이나 형상에서 옛날 석공(石工)들의 손맛이나 체취(體臭)같은 것은 느껴지질 않았다.
영제교와 금천의 답사를 마쳤으니 이제는 흥례문(興禮門)을 봐야 할 차례다. 동행한 노객의 강론은 흥례문의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
“원래 경복궁 창건 당시는 홍례문(弘禮門)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대원군 때 중건하고 흥례문(興禮門)으로 개명했어요…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위해 흥례문을 훼철(毁撤)하였고… 1995년 8월 중앙청(조선총독부 청사)을 철거하였고… 1996년부터 흥례문(興禮門)·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금천(禁川)·영제교(永濟橋)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2001년 10월26일에 완공했지요.”
그런데 답사객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왜 대원군이 그 문명(門名)을 홍례문에서 흥례문으로 바꾸었을까?’이다.
하여간 그 문(門) 이름에서 중심 항렬자(行列子)는 ‘홍(弘)’자가 아니라 ‘예(禮)’자일 것이다. 따라서 홍례문(弘禮門)을 들어갈 때는 왕에 대한 ‘예(禮)’를 지키라는 뜻 일 터이니 그 첫 자가 ‘홍(弘)’이든 ‘흥(興)’이든 구애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홍(弘)’자에서 ‘흥(興)’자로 바꿨을까?
그 개명야화(改名野話)는 이유가 엉뚱하다.
“원래 유교(儒敎) 문화권에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이름을 지을 때 왕과 왕비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금하였지요… 그런데 대원군 당시 청나라 황제는 건륭제(乾隆帝)였는데 그 본명(本名)이 홍역(弘歷)이었어요… 더구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弘化門)이구요… 여러 이유로 개명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어요… 혹시 그 개명을 사대주의 망령이라고 몰아 부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아요… 당시 국가 간의 외교규범(外交規範)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괘념할 바는 아니죠.”
조심조심 그 천록의 거동(擧動)을 살피면서 영제교를 무사히 건넜다. 아무튼 나는 흥례문과 근정문 사이의 영제교 석수(石獸)들이 결코 그냥 돌덩이가 아니라 거기에는 그런 놀라운 메세지(Message)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이제부터는 궐문 안으로 들어 왔으니 우선 그 답사 루트(route)부터 알아봐야겠다.
궐내의 답사 루트는 아무래도 ‘흥례문’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이미 수백 명의 답사객들이 흥례문 앞마당에 붐비고 있었다.
일본 관광단은 관광 가이드의 붉은 깃발 아래 대오(隊伍)를 지어 다니는데 그들의 행동거지는 어딘가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색깔을 벗지 못한 것 같았다. ‘과연 그 사람들은 지금 경복궁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한때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植民地)였다는 우쭐함일까?… 아니면 그에 대한 속죄(贖罪)하는 양심일까?’
마침 때가 삼일절(三一節)을 전후한 시점인지라 별 생각이 다 든다.
그 일본인들을 목격한 영감은 어느새 표정이 굳어져 갔다.
“지금! 바로 이 자리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조선총독부 청사가 있었어요…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정부청사가 있었던 곳이고요.”
그 강론을 듣고 있으려니 일본 제국주의 망령(妄靈)이 어른거렸다.
“그 자들은 총칼로 조선을 멸망시키더니… 망치로 흥례문(興禮門)을 난도질하여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웠어요… 다행히도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았을 때 그걸 철거하고… 그리고 흥례문을 다시 복원하였으니… 정말 일제청산의 대작업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노영감은 갑자기 아주 못마땅한 인상을 지었다.
“글쎄 저기 저… 금천하상(禁川河上)에 깐 바닥석이나 영제교 난간석을 잘 봐요… 저걸 누가 원형대로 복원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어찌 석재(石材)들을 저렇게 매끈하게 다듬을 수 있을까요?… 아마 기계 등으로 정확히 자르고 망치 다듬질로 매끈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건 장식이지 복원이라 말할 수 없잖아요?… 아마 ‘덤벙석(징검다리석)’이 골고루 깔려 있었을 거요.”
하여간 그 질감이나 형상에서 옛날 석공(石工)들의 손맛이나 체취(體臭)같은 것은 느껴지질 않았다.
영제교와 금천의 답사를 마쳤으니 이제는 흥례문(興禮門)을 봐야 할 차례다. 동행한 노객의 강론은 흥례문의 역사에 초점을 맞췄다.
“원래 경복궁 창건 당시는 홍례문(弘禮門)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대원군 때 중건하고 흥례문(興禮門)으로 개명했어요…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위해 흥례문을 훼철(毁撤)하였고… 1995년 8월 중앙청(조선총독부 청사)을 철거하였고… 1996년부터 흥례문(興禮門)·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금천(禁川)·영제교(永濟橋)등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2001년 10월26일에 완공했지요.”
그런데 답사객의 관심사는 아무래도 ‘왜 대원군이 그 문명(門名)을 홍례문에서 흥례문으로 바꾸었을까?’이다.
하여간 그 문(門) 이름에서 중심 항렬자(行列子)는 ‘홍(弘)’자가 아니라 ‘예(禮)’자일 것이다. 따라서 홍례문(弘禮門)을 들어갈 때는 왕에 대한 ‘예(禮)’를 지키라는 뜻 일 터이니 그 첫 자가 ‘홍(弘)’이든 ‘흥(興)’이든 구애 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홍(弘)’자에서 ‘흥(興)’자로 바꿨을까?
그 개명야화(改名野話)는 이유가 엉뚱하다.
“원래 유교(儒敎) 문화권에서는 신하와 백성들이 이름을 지을 때 왕과 왕비의 이름과 겹치는 것을 금하였지요… 그런데 대원군 당시 청나라 황제는 건륭제(乾隆帝)였는데 그 본명(本名)이 홍역(弘歷)이었어요… 더구나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弘化門)이구요… 여러 이유로 개명을 하였다는 주장이 있어요… 혹시 그 개명을 사대주의 망령이라고 몰아 부칠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아요… 당시 국가 간의 외교규범(外交規範)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괘념할 바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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