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황제국 건설에 대한 핵심 코드는 우선 경복궁의 영건(營建) 스케일(Scale)에서 찾을 수 있다. 경복궁 규모는 창건 당시 390여칸(다른 주장이 있으나 1000칸 이하일 것으로 판단됨)으로 제후국 규모였으나, 대원군은 무려 7800여 칸의 대축(大築)을 한 거다.
흔히 궁궐도감(宮闕圖鑑)은 건축을 황제궁은 9999칸, 제후궁은 999칸 그 신하는 99칸으로 그 규모를 제한하였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복궁을 중건하려면 엄청난 자원 조달이 필요할 거다.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사대부나 백성들한테 재원을 조달하려했죠…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의(大義) 앞에 감히 누가 반대하겠어요… 그러나 대원군은 그 성과가 신통치 않자 또 비상한 대책을 쓰게 되지요.”
바로 재원대책이 1868년 발행한 ‘당백전(當百錢)’이다. 그러나 그 화폐가 격심한 통화 팽창을 가져와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원납전(怨納錢)’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원성(怨聲)은 재원만이 아니다. 경향 각지의 인력과 자재를 끌어 모아 공사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부역꾼이 얼마나 중노동에 시달렸는지 불을 지르고 타령(打令)을 지어 불렀다. 당시 저항가요(抵抗歌謠) 중 하나가 ‘경복궁 타령(打令)’이다.
동행한 노객은 잠시 근정전 뜰 앞에 덥석 주저앉더니 그 타령의 몇 가지 사설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이 사설은 꼭두새벽부터 또 공사장에 나갈 생각을 하니 원망스럽다는 표현이다.
‘을축(乙丑) 4월 갑자일(甲子日)에 경복궁을 이루었네….’
여기서는 갑자을축(甲子乙丑)이 아니라 을축갑자(乙丑甲子)라 바꿔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뭔가 경복궁 중건은 민심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빈정대는 말일 거고….
‘도편수란 놈의 거동보소 먹통 메고 갈팡질팡 한다….’
이것은 억지 춘향으로 일을 하니 그 노동에 열중하지 못하고 요령(要領)이나 부린다는 뜻이다.
‘남문 밖에 막걸리 장수야 한잔을 걸러도 큰 애기 솜씨로 걸러라…’라는 사설(辭說)은 당시 당백전의 남발로 갑자기 물가가 치솟아 막걸리 인심도 야박해졌다는 뜻일 거다.
여하튼 경복궁 타령의 가사를 꼼꼼히 해석해보면 그 당시 백성들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나라 방위를 튼튼히 해 서구 열강을 물리쳐야 할 때 엉뚱하게 경복궁 중건(重建)에 그렇게 막대한 재정(財政)을 퍼부으려 하느냐? 지금 도처에서 부정과 부패, 기아와 흉년으로 난리들인데… 그것은 왕권 보위(保衛)를 위한 왕실 사업이지 결코 백성을 위한 민본사업(民本事業)이 아니다… 나라님은 굶주린 자들의 곡간부터 채워줘야 할 게 아니냐?’
어느새 우리 일행은 근정전 앞 조정(朝廷)의 삼도(三道)를 걸어 월대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삼도 좌우에 비석(碑石)처럼 서 있는 저 표지석들은 무엇일까? 그 표석 면에는 ‘정일품(正一品)이니 종이품(從二品)이니’등등 이라고 써 있었다.
“영감님! 저 표지석(標識石)은 무엇을 말하지요?”
“이것을 품계석(品階石)이라고 해요… 임금이 주재하는 조회(朝會)나 의식 때 문무백관들이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그 위치에 도열(堵列)하게 되지요.”
삼도(三道) 좌우 조정에는 군대 사열대(査閱臺)처럼 각각 정·종 9품씩 18등급의 품계석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천학(淺學)의 품계는 어디일까… 나도 현대판 벼슬아치이니 굳이 그걸 비교하면 어디 서야할까? 아무리 후하게 쳐도 당상관은 못되고 이쯤 되겠구나….’
이제 그런 황당한 잡념(雜念)을 그만두고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근정전 앞마당은 흔히 조정(朝廷)이라 말하지요… 동쪽에는 문반(文班)이 서고 서쪽에는 무반(武班)이 도열하는데 그걸 합쳐서 양반(兩班)이라 해요… 바로 조정이니 양반이니 하는 말이 여기서 유래 하였어요… 조정에서는 벼슬의 계급을 중히 여기고 고장에서는 나이의 차례를 중히 여긴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부끄럽다. 우리가 양반(兩班)이란 용어를 늘상 써도 그 어원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흔히 궁궐도감(宮闕圖鑑)은 건축을 황제궁은 9999칸, 제후궁은 999칸 그 신하는 99칸으로 그 규모를 제한하였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복궁을 중건하려면 엄청난 자원 조달이 필요할 거다.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사대부나 백성들한테 재원을 조달하려했죠… 경복궁 중건이라는 대의(大義) 앞에 감히 누가 반대하겠어요… 그러나 대원군은 그 성과가 신통치 않자 또 비상한 대책을 쓰게 되지요.”
바로 재원대책이 1868년 발행한 ‘당백전(當百錢)’이다. 그러나 그 화폐가 격심한 통화 팽창을 가져와 백성들의 원성을 사는 ‘원납전(怨納錢)’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의 원성(怨聲)은 재원만이 아니다. 경향 각지의 인력과 자재를 끌어 모아 공사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부역꾼이 얼마나 중노동에 시달렸는지 불을 지르고 타령(打令)을 지어 불렀다. 당시 저항가요(抵抗歌謠) 중 하나가 ‘경복궁 타령(打令)’이다.
동행한 노객은 잠시 근정전 뜰 앞에 덥석 주저앉더니 그 타령의 몇 가지 사설을 늘어놓는 게 아닌가?
‘남문을 열고 파루(罷漏)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이 사설은 꼭두새벽부터 또 공사장에 나갈 생각을 하니 원망스럽다는 표현이다.
‘을축(乙丑) 4월 갑자일(甲子日)에 경복궁을 이루었네….’
여기서는 갑자을축(甲子乙丑)이 아니라 을축갑자(乙丑甲子)라 바꿔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뭔가 경복궁 중건은 민심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빈정대는 말일 거고….
‘도편수란 놈의 거동보소 먹통 메고 갈팡질팡 한다….’
이것은 억지 춘향으로 일을 하니 그 노동에 열중하지 못하고 요령(要領)이나 부린다는 뜻이다.
‘남문 밖에 막걸리 장수야 한잔을 걸러도 큰 애기 솜씨로 걸러라…’라는 사설(辭說)은 당시 당백전의 남발로 갑자기 물가가 치솟아 막걸리 인심도 야박해졌다는 뜻일 거다.
여하튼 경복궁 타령의 가사를 꼼꼼히 해석해보면 그 당시 백성들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다.
‘나라 방위를 튼튼히 해 서구 열강을 물리쳐야 할 때 엉뚱하게 경복궁 중건(重建)에 그렇게 막대한 재정(財政)을 퍼부으려 하느냐? 지금 도처에서 부정과 부패, 기아와 흉년으로 난리들인데… 그것은 왕권 보위(保衛)를 위한 왕실 사업이지 결코 백성을 위한 민본사업(民本事業)이 아니다… 나라님은 굶주린 자들의 곡간부터 채워줘야 할 게 아니냐?’
어느새 우리 일행은 근정전 앞 조정(朝廷)의 삼도(三道)를 걸어 월대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삼도 좌우에 비석(碑石)처럼 서 있는 저 표지석들은 무엇일까? 그 표석 면에는 ‘정일품(正一品)이니 종이품(從二品)이니’등등 이라고 써 있었다.
“영감님! 저 표지석(標識石)은 무엇을 말하지요?”
“이것을 품계석(品階石)이라고 해요… 임금이 주재하는 조회(朝會)나 의식 때 문무백관들이 벼슬의 높낮이에 따라 그 위치에 도열(堵列)하게 되지요.”
삼도(三道) 좌우 조정에는 군대 사열대(査閱臺)처럼 각각 정·종 9품씩 18등급의 품계석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천학(淺學)의 품계는 어디일까… 나도 현대판 벼슬아치이니 굳이 그걸 비교하면 어디 서야할까? 아무리 후하게 쳐도 당상관은 못되고 이쯤 되겠구나….’
이제 그런 황당한 잡념(雜念)을 그만두고 본론으로 돌아가야겠다.
“근정전 앞마당은 흔히 조정(朝廷)이라 말하지요… 동쪽에는 문반(文班)이 서고 서쪽에는 무반(武班)이 도열하는데 그걸 합쳐서 양반(兩班)이라 해요… 바로 조정이니 양반이니 하는 말이 여기서 유래 하였어요… 조정에서는 벼슬의 계급을 중히 여기고 고장에서는 나이의 차례를 중히 여긴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부끄럽다. 우리가 양반(兩班)이란 용어를 늘상 써도 그 어원이 과연 어디서 나왔는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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