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는 순교자(殉敎者)인가?

    기고 / 시민일보 / 2007-01-04 16:10:56
    • 카카오톡 보내기
    이노근(노원구청장)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핵심은 아무래도 인재등용 방법이다.

    “사림파 등 개혁세력들은 훈구세력들이 과거제도를 악용하여 부정과 파벌을 지어왔기 때문에…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현량과(賢良科:천거제)를 신설하였는데… 이때 무려 28명의 관리가 천거방식(薦擧方式)으로 등용 됐어요.”

    그런데 왜 그러한 개혁정치가 중도에 좌초되고 말았나요?

    “당시 개혁과제가 워낙 난제(難題)인지라 혁명이 아니고서는 성사시키기 어려웠지요… 더구나 위훈삭탈, 토지와 노비 몰수는 훈구파를 크게 자극했고… 그러니까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한 거였지요.”

    그렇다면 개혁파 조광조는 왜 권좌에서 밀려났나요?

    훈구파가 꾸민 소위 주초위왕(走肖爲王) 역모사건이 발단이 됐다. 그 주초위왕 사건은 알다시피 남곤 등 훈구파 세력들이 정적(政敵) 조광조 등 사림파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흉계이다. 그 혐의의 근거는 당시 남곤의 거택(居宅)이 경복궁 후방의 백악산(白岳山:현재의 북악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감님! 중종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조광조 등 사림파가 그 사건을 작당했다고 보았나요?”

    “당시 중종은 그 정체불명의 괴현상(怪現象)을 접하고 몹시 당황을 했어요… 그 불길한 징조(徵兆)를 접하고서 누군가 왕권을 넘보고 있다고 의심한 거지요…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 등 사림파에 그 혐의를 두고 그들을 탄핵했지요…”

    바로 그게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시발(始發)이었다.

    아무튼 중종실록은 그 탄핵정국을 아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탄핵일은 1519년(중종 14년) 11월 16일이다. 당시 탄핵추관 김선·이장곤·홍숙 등이 중종에게 상언한 사림파에 대한 죄목은 이러하다.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 사림파는 서로 붕비(朋比)를 맺어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薦擧)하고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국론이 전도되고 조정이 날로 글러가게 하매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그 세력이 치열한 것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였으니… 그 죄는 다 참(斬)하고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관에 몰수하는데 해당합니다.”

    참형(斬刑)이라하면 죄인의 머리를 형목(刑木)에 붙들어 매고 칼로 그의 목을 베는 형벌로 대역죄인을 다스릴 때나 적용하는 극형이니 당시 양 세력간의 대치정국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조정 중신들은 중종에게 사림파에 대한 그러한 참형(斬刑)은 너무 부당하다며 수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오히려 역모(逆謀)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서로 붕비(朋比)를 맺었다는 말을 저들이 승복하지 않고 중함도 없는데… 그들에게 이율로 죄주면 성덕(聖德)에 크게 누가 될 것입니다. 면대(面對)하여 친계(親啓)하게 하여 주소서.’ (의정부, 육조, 한성부)
    ‘조광조 등은 다 젊은 사람이니 이는 어설프고 곧기 만한 소치인데 어찌 심한 죄를 줘야 마땅하겠습니까?’ (안당)
    ‘임금이 살육(殺戮)의 꼬투리를 열면 국가의 기맥(氣脈)이 크게 상할 것이니 더 짐작하셔야 합니다.’ (정광필)

    여하튼 조정신료들이 감형(減刑)을 청원하는 상소가 끊이질 않자 중종은 마지막 판부(判付)에서 그 징벌 수위를 낮췄다.

    ‘조광조 등의 죄는 조율로 보면 과연 사사(賜死)해야 하겠으나 깊이 생각하고 또 대신의 망(望)을 반복해서 생각하니 사사하면 놀랄듯하다… 조광조 등 4인은 감사(減死)하여 고신(告身)을 진탈(盡奪)하고 장일백(杖一百)에 처하고 원방(遠方)에 안치(安置)하며….’

    결국 그 원방안치형(遠方安置刑)에 따라 조광조는 능주(綾州:화순)로 유배되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38세의 나이로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 그 때가 1519년(기묘년) 중종 14년 12월20일이며 바로 그 사건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역사는 그렇게 정암 조광조를 개혁정치의 순교자(殉敎者)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사정전(思政殿) 뜨락이 중종이 조광조를 국문(鞫問)하던 재판정이란 말인가? 여하튼 정암 조광조가 죽기직전 중종께 남긴 유언시(遺言詩)는 능히 당시 그분의 심경(心境)을 읽어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조광조의 개혁정책은 불행히도 중도에 좌초되고 말았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