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체제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적대적인 대립관계로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왔다. 한편이 다른 한편을 무찔러야만 통일이 되는 것으로 믿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대결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남과 북이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정황도 있었고, 시대적인 흐름도 있었다. 1945년 해방 후의 우리 정치는 사상적인 대립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어느 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적인 자유주의 체제의 확립을 의미했다. 여기에 맞서서 공산주의 체제가 북한에 수립됨으로써 분단체제라는 비극적인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열에서 더 나아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전락하여 어느 일방의 지배와 승리만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종말적인 상황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 비극은 6·25전쟁,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이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난 그 해 10월, 포탄이 오가는 사이에서 태어났다.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그 전쟁은 3년에 걸친 혈투로 이어졌고, 온 산하를 피로 물들였다. 1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한국전쟁의 비극성이 온 세계에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그 의미와 성격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음 몇 가지만은 지적해 두고 싶다.
첫째, 6·25전쟁은 국제전이면서도 민족 전쟁이라는 이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과 중공군이 참전했고, 소련군이 실질적으로 북한을 지원했으며 유엔 16개국이 한국을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서 참전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민족 전쟁이자 국제 전쟁으로 변모된 이원적 전쟁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둘째, 6·25전쟁은 그 전면에 이데올로기를 내세웠으며, 가장 치열한 이념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셋째,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단순한 휴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6·25전쟁이야말로 사실상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특정 집단이 계급혁명을 내세우면서 같은 민족을 적대세력으로 몰아 죽음의 살육을 저질렀던, 실로 반민족적인 행위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전쟁의 책임이나 궁극적인 의도가 지닌 한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6·25전쟁의 의미와 성격을 밝혀놓아야만 민족 과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전쟁은 우리 민족의 분단과 갈등을 더 한층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남과 북의 민중들 사이에 상호간에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행해졌던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1960년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가 강화될 수 있었던 배경도 6·25전쟁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일인지배의 강압적인 전제통치가 자행될 수 있었고, 그를 위한 공산당의 일당지배가 공고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리고 철두철미한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 통치가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역시 6·25전쟁의 여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킨 반민족적 세력들이 그대로 온존하고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가져다준 6·25전쟁의 묘한 비극적 상황은 계속해서 민족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전쟁의 악몽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악몽으로 덕을 보는 집단이나 인사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절망적인 분열의식을 가져다준 전쟁, 그 전쟁의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민족 통일의 새로운 접근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어느 면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공적인 자유주의 체제의 확립을 의미했다. 여기에 맞서서 공산주의 체제가 북한에 수립됨으로써 분단체제라는 비극적인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분열에서 더 나아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전락하여 어느 일방의 지배와 승리만이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종말적인 상황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 비극은 6·25전쟁,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의 남침이었다.
나는 전쟁이 일어난 그 해 10월, 포탄이 오가는 사이에서 태어났다.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 전쟁의 후유증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그 전쟁은 3년에 걸친 혈투로 이어졌고, 온 산하를 피로 물들였다. 1백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면서 한국전쟁의 비극성이 온 세계에 부각되었다. 여기에서 그 의미와 성격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다음 몇 가지만은 지적해 두고 싶다.
첫째, 6·25전쟁은 국제전이면서도 민족 전쟁이라는 이원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미군과 중공군이 참전했고, 소련군이 실질적으로 북한을 지원했으며 유엔 16개국이 한국을 위해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서 참전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은 민족 전쟁이자 국제 전쟁으로 변모된 이원적 전쟁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둘째, 6·25전쟁은 그 전면에 이데올로기를 내세웠으며, 가장 치열한 이념 전쟁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었던 바로 그러한 성격의 전쟁이었다.
셋째, 6·25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단순한 휴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6·25전쟁이야말로 사실상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특정 집단이 계급혁명을 내세우면서 같은 민족을 적대세력으로 몰아 죽음의 살육을 저질렀던, 실로 반민족적인 행위 그 자체였다.
나는 지금 전쟁의 책임이나 궁극적인 의도가 지닌 한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6·25전쟁의 의미와 성격을 밝혀놓아야만 민족 과제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전쟁은 우리 민족의 분단과 갈등을 더 한층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남과 북의 민중들 사이에 상호간에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다.
6·25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행해졌던 이승만의 독재정치가 1960년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뒤 박정희 대통령의 권위주의가 강화될 수 있었던 배경도 6·25전쟁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 일인지배의 강압적인 전제통치가 자행될 수 있었고, 그를 위한 공산당의 일당지배가 공고화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리고 철두철미한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 통치가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역시 6·25전쟁의 여파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을 일으킨 반민족적 세력들이 그대로 온존하고 지속될 수 있는 여건을 가져다준 6·25전쟁의 묘한 비극적 상황은 계속해서 민족의 앞길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전쟁의 악몽을 가지고 있는 한 그 악몽으로 덕을 보는 집단이나 인사들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에게 가장 절망적인 분열의식을 가져다준 전쟁, 그 전쟁의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어느 면에서는 민족 통일의 새로운 접근일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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