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68년 4월4일 미국에서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이야기는 그 당시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는 미국 남부 지방에서 인종 차별에 맞서서 그 장벽을 맨 몸으로 무너뜨린 인물이었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흑인, 백인 모두가 한 형제라는 신념에 찬 설득으로 인종 차별의 그 험준한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실천했다.
그는 1963년 8월28일, 워싱톤 행진(The March on Washington)을 하기 위해 모인 25만 명이 넘는 대군중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외쳤다.
‘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노예였던 사람들의 자손과 그 노예 주인의 아들 딸들이 같은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을 그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자녀도 피부 색깔이 아닌 인격만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인 흑인, 백인, 유대인, 이방인, 가톨릭, 개신교의 자녀들이 모두 손에 손잡고 살아가는, 흑인 영가의 가사와도 같이 드디어 우리는 자유를 찾았노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정말로 이 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백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무너뜨리고 흑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흑인과 백인이 함께 손잡고 진정한 의미의 평등과 평화 그리고 인간화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이기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다. ‘모두를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킹 목사의 위대한 꿈이었다.
나는 한동안 킹 목사의 그 구절을 마음속으로 외우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고단한 내 삶에서, 어려운 일상에서, 좌절과 울분의 시간 속에서 나를 지켜줄 단 하나의 위로의 말이 바로 ‘나는 꿈을 갖고 있다!’라는 그 말이었다.
나는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그 말의 철학적인 의미 같은 것은 지금도 잘 모른다. 그것을 구체화할 실천적인 방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방법이 인도의 간디가 실천했던 무저항주의와 비슷하다고만 여겨왔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이치를 조금 알게 되자 비로소 ‘다 함께’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차별을 싫어한다. 인종에 대한 차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 배우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등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에 대한 차별을 싫어한다.
갈등과 분열 그리고 차별로 가득 찬 이 세상에 킹 목사의 연설은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가난이라는 주어진 여건 때문에 항상 가슴 한 곳을 움켜쥐며 지내야 했던 나에게 킹 목사의 연설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신념을 가져다주었다.
원수를 갚는다고 상대방에게 피 흘리는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복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뒷날 그 상대방으로부터 또다시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원수를 갚는 가장 소중하고도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승리는 상대방과 ‘함께하는 것’임을 나는 절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배웠던 가르침이고 내 삶의 중요한 좌표이기도 하다.
그는 기도를 통해서 흑인, 백인 모두가 한 형제라는 신념에 찬 설득으로 인종 차별의 그 험준한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실천했다.
그는 1963년 8월28일, 워싱톤 행진(The March on Washington)을 하기 위해 모인 25만 명이 넘는 대군중 앞에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외쳤다.
‘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노예였던 사람들의 자손과 그 노예 주인의 아들 딸들이 같은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을 그때가 언젠가는 반드시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네 자녀도 피부 색깔이 아닌 인격만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꿈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인 흑인, 백인, 유대인, 이방인, 가톨릭, 개신교의 자녀들이 모두 손에 손잡고 살아가는, 흑인 영가의 가사와도 같이 드디어 우리는 자유를 찾았노라는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그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정말로 이 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꿈은, 백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무너뜨리고 흑인이 지배하는 세상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흑인과 백인이 함께 손잡고 진정한 의미의 평등과 평화 그리고 인간화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이기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었다. ‘모두를 승리자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킹 목사의 위대한 꿈이었다.
나는 한동안 킹 목사의 그 구절을 마음속으로 외우고 다닌 적이 있었다. ‘나에게는 꿈이 있다.’ 고단한 내 삶에서, 어려운 일상에서, 좌절과 울분의 시간 속에서 나를 지켜줄 단 하나의 위로의 말이 바로 ‘나는 꿈을 갖고 있다!’라는 그 말이었다.
나는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그 말의 철학적인 의미 같은 것은 지금도 잘 모른다. 그것을 구체화할 실천적인 방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방법이 인도의 간디가 실천했던 무저항주의와 비슷하다고만 여겨왔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이치를 조금 알게 되자 비로소 ‘다 함께’라는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차별을 싫어한다. 인종에 대한 차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 배우지 못한 사람에 대한 차별, 장애인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 등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에 대한 차별을 싫어한다.
갈등과 분열 그리고 차별로 가득 찬 이 세상에 킹 목사의 연설은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가난이라는 주어진 여건 때문에 항상 가슴 한 곳을 움켜쥐며 지내야 했던 나에게 킹 목사의 연설은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신념을 가져다주었다.
원수를 갚는다고 상대방에게 피 흘리는 복수를 감행하는 것은 비록 일시적으로는 복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뒷날 그 상대방으로부터 또다시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세상에서 원수를 갚는 가장 소중하고도 유일한 방법은 ‘용서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승리는 상대방과 ‘함께하는 것’임을 나는 절감할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마틴 루터 킹 목사로부터 배웠던 가르침이고 내 삶의 중요한 좌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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