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는 답사화두를 다시 자경전 후원(後園)으로 돌려야겠다. 그러나 후원답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학습목록은 아무래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어야 한다.
자경전(慈慶殿) 뒤 담장 전면부에 조성된 후원에는 소위 ‘십장생 굴뚝’이 배영 되어 있는데 그 축조기법이 기발하다.
“굴뚝 하단부의 십장생(十長生) 화면(畵面)을 봐요! 평면적 회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체적 부조도 아니고… 참으로 그 조형기법이 독특하지요… 질감(質感)의 조형성과 음양(陰陽)의 입체감도 뚜렷하고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뜻하지요.”
부귀영화의 상징 언어들이다. (보물 810호) ‘해·산·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대나무 등…’
“화강석 돌가루에 백회를 버무리고 그걸 구운 전(塼)벽돌로 만든 거죠…”
바로 조선시대 명장(名匠)들의 탁월한 재주가 기어코 십장생 굴뚝을 국가문화재로 만드는데 기여한거다.
그러나 ‘자경전’에서 소중한 학습목록을 찾으려면 어느 정도 수고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십중팔구의 답사꾼들은 그 답사목록에서 자경전(慈慶殿)의 정문 ‘만세문(萬歲門)’을 누락시키는 우(愚)를 범한다. 그 문명미학(門名美學)이 자경전 학습에서 가장 대범한 키워드(keyword)가 될 텐데도 말이다.
그 문명철학(門名哲學)을 해석 할 때 그냥 ‘대왕대비께서 만년세월을 장수(長壽)하라는 소망에서 지어졌다’고 뜻한다면 기꺼이 나는 그 화두를 포기하겠다.
그러나 답사꾼들이 그 ‘만세문’에서 학습코어(core)를 찾는다면 장담하건데 만세(萬歲)와 천세(千歲)의 차이를 배우라고 권고하고 싶다.
“원래 극존칭의 만세(萬歲)는 중국황제의 영광이었는데 조선이 감히 그 호칭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여하튼 천세(千歲)와 만세(萬歲)의 차이를 알고 나면 정말 속상할 거다.
“과거 한·중 역사를 살펴봐요… 중국 황실에서는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극존칭(極尊稱)하고…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천세 천세 천천세’라고 하칭(下稱)하였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한 중년쯤 돼 보이는 이객(異客)이 우리 대화를 귀동냥하고 있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단정하고 말쑥한 양복에 점잖은 말투는 영락없는 역사 교수 같았다.
“선생님들! 듣자하니 뭔가 잘못 알고 있어요… 고려 태조 왕건(王建) 이래 줄곧 만세(萬歲)라고 산호(山呼)하였어요… 비록 고려 말 원(元)나라가 간섭하여 천세(千歲)로 격하되었지만… 원래 고려는 황제국의 권세를 가졌어요!”
여하튼 고려사(高麗史)가 그 분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됐다.
‘고려 충렬왕 원년 11월에 왕은 금오산(金鼇山) 편액의 성수만세(聖壽萬歲)의 글자를 고쳐 경력천추(經歷千秋)라 하고… 만세(萬歲)라 부르던 것을 천세(千歲)라 하고 연로(輦路)에 황토(黃土) 펴는 것을 금하였다.’
정말 황제국 고려가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羞恥)의 역사 대목이다.
사실 황제국(皇帝國)이 아니고서는 ‘만세니… 황토니…’하는 존칭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나라가 고려를 식민지처럼 지배를 했을 때지요… 그때 충렬왕은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하고… 1272년에 돌아왔는데… 그는 이미 몽고풍 변발과 호복(胡服)을 하였어요.”
다음으로 조선은 임금에 대한 호칭을 무엇이라 사용했을까?
“조선은 명나라와 개국 초기부터 사대선린(事大善隣) 관계를 유지하였지요… 그래서 임금 산호(山呼)는 천세(千歲)로 사용했어요.”
그런 것을 보면 흥선 대원군은 고종이 왕에 오른 초기부터 이미 언젠가는 황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다진 것 같다.
사실 고종황제가 1897년 즉위 후부터는 만세(萬歲)라고 극존칭을 사용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설득력 있는 것 같다.
자경전(慈慶殿) 뒤 담장 전면부에 조성된 후원에는 소위 ‘십장생 굴뚝’이 배영 되어 있는데 그 축조기법이 기발하다.
“굴뚝 하단부의 십장생(十長生) 화면(畵面)을 봐요! 평면적 회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입체적 부조도 아니고… 참으로 그 조형기법이 독특하지요… 질감(質感)의 조형성과 음양(陰陽)의 입체감도 뚜렷하고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뜻하지요.”
부귀영화의 상징 언어들이다. (보물 810호) ‘해·산·구름·바위·소나무·거북·사슴·학·불로초·대나무 등…’
“화강석 돌가루에 백회를 버무리고 그걸 구운 전(塼)벽돌로 만든 거죠…”
바로 조선시대 명장(名匠)들의 탁월한 재주가 기어코 십장생 굴뚝을 국가문화재로 만드는데 기여한거다.
그러나 ‘자경전’에서 소중한 학습목록을 찾으려면 어느 정도 수고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십중팔구의 답사꾼들은 그 답사목록에서 자경전(慈慶殿)의 정문 ‘만세문(萬歲門)’을 누락시키는 우(愚)를 범한다. 그 문명미학(門名美學)이 자경전 학습에서 가장 대범한 키워드(keyword)가 될 텐데도 말이다.
그 문명철학(門名哲學)을 해석 할 때 그냥 ‘대왕대비께서 만년세월을 장수(長壽)하라는 소망에서 지어졌다’고 뜻한다면 기꺼이 나는 그 화두를 포기하겠다.
그러나 답사꾼들이 그 ‘만세문’에서 학습코어(core)를 찾는다면 장담하건데 만세(萬歲)와 천세(千歲)의 차이를 배우라고 권고하고 싶다.
“원래 극존칭의 만세(萬歲)는 중국황제의 영광이었는데 조선이 감히 그 호칭을 어떻게 사용했을까?”
여하튼 천세(千歲)와 만세(萬歲)의 차이를 알고 나면 정말 속상할 거다.
“과거 한·중 역사를 살펴봐요… 중국 황실에서는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극존칭(極尊稱)하고…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천세 천세 천천세’라고 하칭(下稱)하였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갑자기 한 중년쯤 돼 보이는 이객(異客)이 우리 대화를 귀동냥하고 있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단정하고 말쑥한 양복에 점잖은 말투는 영락없는 역사 교수 같았다.
“선생님들! 듣자하니 뭔가 잘못 알고 있어요… 고려 태조 왕건(王建) 이래 줄곧 만세(萬歲)라고 산호(山呼)하였어요… 비록 고려 말 원(元)나라가 간섭하여 천세(千歲)로 격하되었지만… 원래 고려는 황제국의 권세를 가졌어요!”
여하튼 고려사(高麗史)가 그 분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됐다.
‘고려 충렬왕 원년 11월에 왕은 금오산(金鼇山) 편액의 성수만세(聖壽萬歲)의 글자를 고쳐 경력천추(經歷千秋)라 하고… 만세(萬歲)라 부르던 것을 천세(千歲)라 하고 연로(輦路)에 황토(黃土) 펴는 것을 금하였다.’
정말 황제국 고려가 부끄러워해야 할 수치(羞恥)의 역사 대목이다.
사실 황제국(皇帝國)이 아니고서는 ‘만세니… 황토니…’하는 존칭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나라가 고려를 식민지처럼 지배를 했을 때지요… 그때 충렬왕은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을 하고… 1272년에 돌아왔는데… 그는 이미 몽고풍 변발과 호복(胡服)을 하였어요.”
다음으로 조선은 임금에 대한 호칭을 무엇이라 사용했을까?
“조선은 명나라와 개국 초기부터 사대선린(事大善隣) 관계를 유지하였지요… 그래서 임금 산호(山呼)는 천세(千歲)로 사용했어요.”
그런 것을 보면 흥선 대원군은 고종이 왕에 오른 초기부터 이미 언젠가는 황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다진 것 같다.
사실 고종황제가 1897년 즉위 후부터는 만세(萬歲)라고 극존칭을 사용하였으니 그 말이 매우 설득력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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