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력이 약해서 구둣방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12살에 의무교육을 끝내자 그랜덤의 식료품점 ‘클리포드’에서 도제 수업을 시작했다. 식료품점에서 일했던 것은 그의 인생에서 다행이었다. 시력이 약했던 것이 거꾸로 그의 인생에 플러스가 되는 계기가되었다.
그는 여기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원래 교사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던 만큼 머리의 회전이 빨랐다.
머리가 좋은 데다 비길 데 없는 부지런함으로 그는 20대 초반에 이 점포의 지배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런 그의 총명함과 근면의 정신을 차녀 마가렛이 이어받게 된다.
알프렛은 열성적인 메서디스트(Methodist) 파의 그리스도교도였다. 일요일이면 오전에 한 번,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한 번, 하루 두 번이나 교회에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일요일에 교회에 두 번 다니는 것은 마가렛이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알프렛이 미래의 아내 베아트리스 스티븐슨(Beatrice Stephenson)과 만난 것도 이 교회였다. 양친이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던 것은 마가렛의 장래에도 영향을 주었다.
약간 움푹 들어간 안구에서의 시선은 부정이나 속이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움과 냉정함이 있었다. 차녀 마가렛은 아버지의 단정한 얼굴 생김과 어머니의 엄한 눈매를 이어받았다.
베아트리스가 알프렛의 구애에 응한 것은 단지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성실함, 독실한 신앙은 그녀의성격과 딱 일치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같은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랜덤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서 손님의 화물 입출 담당이었다.
젊은 두 사람은 약혼 기간 중 사랑에만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알프렛은 식료품 점포에서 일하고 베아트리스는 삯바느질을 해서, 두 사람은 1917년에 결혼할 때까지 ‘두 사람의 점포를 가지겠다’는 꿈을 가능하게 할 만큼의 돈을 저축했다.
노스 퍼레이드 1번지는 두 사람의 저금을 합해 구입한 식품 잡화점의 소재지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중산계급 바로 아래 계층에 겨우 기어올랐다. 영국의 사회학자라면, 중산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결정적 차이는 ‘사회적으로 상승을 지향하는 의지의 유무’라 할 것이다. 사회적 계급의 계단을 올라가려는 의지가 있는 자가 중산계급이고, 견고한 동류의식때문에 동류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의 상승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노동자 계급이다.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도 중산계급에 들어갔다고 해도 된다.
그들은 구입한 집의 1층을 점포로 2층과 3층을 가족용 방으로 삼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설비도 없었고 화장실도 집 뒤쪽의 작은 빈터에 있는, 정말이지 중산계급의 아래층에 어울리는 집이었다. 하지만 알프렛과 베아트리스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였다. 자신들의 집을가진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 일에 대한 의욕을 더욱 북돋우었다.
1925년 10월13일 마가렛 힐다 로버트, 나중의 영국 수상은 이 집의 2층에서 태어났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이 집에 살게 된다. 인생의 골격은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된다. 그만큼 노스 퍼레이드 1번지는 그녀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녀의 인생의 골격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가렛은 고지식한 아이였다. 그 성격은 양친의 피를 이어받은 탓도 있었으나, 동시에 가정 속에서 자란 탓도 있었다. 로버트 가에는 마가렛보다 네살 위인 뮤리엘(Muriel)과 외할머니 피비(Phoebe) 스티븐슨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마가렛이 10살일 때 사망했으나 그때까지 마가렛에게 하나의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그는 여기서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원래 교사가 되려는 희망을 품었던 만큼 머리의 회전이 빨랐다.
머리가 좋은 데다 비길 데 없는 부지런함으로 그는 20대 초반에 이 점포의 지배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런 그의 총명함과 근면의 정신을 차녀 마가렛이 이어받게 된다.
알프렛은 열성적인 메서디스트(Methodist) 파의 그리스도교도였다. 일요일이면 오전에 한 번, 점심을 먹고 나서 또 한 번, 하루 두 번이나 교회에 다닐 정도로 열심이었다. 일요일에 교회에 두 번 다니는 것은 마가렛이 태어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알프렛이 미래의 아내 베아트리스 스티븐슨(Beatrice Stephenson)과 만난 것도 이 교회였다. 양친이 경건한 그리스도교도였던 것은 마가렛의 장래에도 영향을 주었다.
약간 움푹 들어간 안구에서의 시선은 부정이나 속이는 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듯한 날카로움과 냉정함이 있었다. 차녀 마가렛은 아버지의 단정한 얼굴 생김과 어머니의 엄한 눈매를 이어받았다.
베아트리스가 알프렛의 구애에 응한 것은 단지 얼굴이 잘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성실함, 독실한 신앙은 그녀의성격과 딱 일치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같은 노동자 계급에 속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랜덤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서 손님의 화물 입출 담당이었다.
젊은 두 사람은 약혼 기간 중 사랑에만 빠지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알프렛은 식료품 점포에서 일하고 베아트리스는 삯바느질을 해서, 두 사람은 1917년에 결혼할 때까지 ‘두 사람의 점포를 가지겠다’는 꿈을 가능하게 할 만큼의 돈을 저축했다.
노스 퍼레이드 1번지는 두 사람의 저금을 합해 구입한 식품 잡화점의 소재지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중산계급 바로 아래 계층에 겨우 기어올랐다. 영국의 사회학자라면, 중산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결정적 차이는 ‘사회적으로 상승을 지향하는 의지의 유무’라 할 것이다. 사회적 계급의 계단을 올라가려는 의지가 있는 자가 중산계급이고, 견고한 동류의식때문에 동류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의 상승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노동자 계급이다. 두 사람은 이런 점에서도 중산계급에 들어갔다고 해도 된다.
그들은 구입한 집의 1층을 점포로 2층과 3층을 가족용 방으로 삼았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설비도 없었고 화장실도 집 뒤쪽의 작은 빈터에 있는, 정말이지 중산계급의 아래층에 어울리는 집이었다. 하지만 알프렛과 베아트리스는 기대에 가슴이 설레였다. 자신들의 집을가진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 일에 대한 의욕을 더욱 북돋우었다.
1925년 10월13일 마가렛 힐다 로버트, 나중의 영국 수상은 이 집의 2층에서 태어났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이 집에 살게 된다. 인생의 골격은 여기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된다. 그만큼 노스 퍼레이드 1번지는 그녀에게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녀의 인생의 골격이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마가렛은 고지식한 아이였다. 그 성격은 양친의 피를 이어받은 탓도 있었으나, 동시에 가정 속에서 자란 탓도 있었다. 로버트 가에는 마가렛보다 네살 위인 뮤리엘(Muriel)과 외할머니 피비(Phoebe) 스티븐슨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마가렛이 10살일 때 사망했으나 그때까지 마가렛에게 하나의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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