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딸 (6)

    기고 / 시민일보 / 2007-03-13 16: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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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봉(변호사) 譯
    아버지의 자극을 받아 마가렛은 10살에 이미 정치 활동에 손을 댔다. 1935년의 총선거에서 로버트 가는 온 집안이 나서서 보수 후보 빅터 워렌더(Victor Warrender)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마가렛은 아버지와 함께 후보자의 선거사무소에 출입했다. 10살짜리 아이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턱은 없었다. 그래도 투표일에는 투표 접수 인에게서 투표자의 이름을 듣고 선거대책본부에 통지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보수 후보 지지자가 투표하지 않은 경우 투표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으로 엿본 정치는 그녀를 몹시 흥분시켰다. 한 인간을 정치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입에 거품을 무는 그 이상한 세계가 그녀의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10살에 이미 그녀는 정치의 마력에 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같은해 시장 선거에 입후보한 아더이치 시의회 의원의 선거운동도 도왔다. 아버지가 도와주게 되었기 때문인데 그녀도 어리지만 전단을 배포했다. “귀여운 운동원이군” 전단을 받아 든 사람들은 미소를 지었다. 어른은 그 귀여움을 이용한 것이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에 반응하는 것에 매우 감동했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맛볼 수 없는 체험이었다. 다음해 1936년 아버지 알프렛이 시의회 의원에 입후보했다. 전단 배포는 두 번째 경험이다.

    자신의 귀여움이 도움이 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단을 배포하면서도 후보자가 아버지인 것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딸이 아버지를 위해 힘쓰는 것은 당연하다. 아버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어필하려면 후보자의 가족이 아닌 자가 후보자를 지지하는 것으로 보여주는 편이 낫다. 마가렛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런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적 직감이 있었다.

    알프렛은 최연소 의원으로 처음으로 당선하고, 그 후 시의회의 재정소위원회 위원장, 그랜덤의 그래머 스쿨 이사장 등을 역임하여 시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고 1943년에는 마침내 시장에 당선되었다.

    그동안 마가렛은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 왔다. 아버지도 또 딸에게 시의 정치, 국가 정세, 나치의 대두에 의한 유럽의 위기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알프렛은 딸과의 지적인 대화를 즐겼다. 아내 베아트리스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대화였다. 마가렛은 어릴 적부터 시작한 방대한 독서량과 사회의 움직임에 대한 호기심 덕분으로 아버지와 어른의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대화 속에서 마가렛은 스스로의 힘으로 점포를 일으키고 확장해간 아버지의 자수성가 사상을 흡수했다. 그는 인생은 끝까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신념에 가득차 있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진 이 남자는 사상적으로는 자유당적이고, 지지자 중에는 보수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그 자신은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고 무소속 의원으로 일관했다. 정당에 구속되는 것을 싫어한 독립적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와 생각을 같이 하는 상공회의소, 로터리 클럽의 중소 자영업자들은 “정치나 지방 행정부가 개인의 생활을 규제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세금을 부담하는 쪽은 자신들이라고 믿었으며 세금을 적게 내어 간섭 받지 않고 자신의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바라고 있었다. 국가가 국민의 복지를 가능한 한 챙기려는 노동당의 정책에는 정면으로 반대였다. 국가나 권력은 개인의 생활이 위협 받을 때만 국민의 생활을 지키면 된다는 야경국가론, 정부는 국민생활에 대한 간섭을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는 ‘작은 정부’ ‘싸구려 정부’론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고전적 자유주의 론이며 자영 독립 상인의 자부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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