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상남도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 거제도다. 태평양을 끼고 섬들이 점점이 흩뿌려진 그림 같은 바다, 한겨울에도 동백꽃이 붉게 피는 언덕과 하얀 모래톱에 마치 보석처럼 박혀있는 자갈들, 막 육지를 향해 떠나려는 여객선 뱃머리의 설렘….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실은 아픔투성이였다. 아버지의 실의와 가난이 고통의 씨앗이었다.
아버지는 올곧고 강직하셨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버지는 헝클어지고 뒤틀린 세상에서 몸을 굽힐 줄 몰랐다. 아버지의 이런 성품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할아버지는 남원 향교에 적을 둔 유학자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남 함양에서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집안에는 유교적인 질서와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올곧고 강직한 성품도 이런 집안의 정신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 후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로 유학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 할아버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경 유학길을 떠났다.
그리고 해방 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신학문을 배운 신생 국가의 젊은 사람들 앞에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던 시절이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독립국의 경찰이 출범하던 때를 맞추어 아버지는 경찰에 투신했다. 왜 하필 경찰이었을까. 일본 경찰에 당한 할아버지의 고난을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자신의 곧은 성품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모범적인 경찰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품은 법을 준수하고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데는 유효하였으나 정작 자신이 살아갈 길을 밝히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굴신하고 부화하는 처세에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경찰에 몸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두 번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훈장과 표창장도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주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일본 오사카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후 오사카 철도국에서 일한 신여성이었다. 두 분 모두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지식인으로, 남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 행복한 집안에 불행이 찾아든 것은 197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할머니 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였다.
1972년 거제도에서 거물 간첩 유이화 사건이 터졌다. 고정간첩 유이화는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할머니였다. 아버지는 이 할머니를 체포, 심문하여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간첩 31명을 검거하는 대규모 전과를 올렸다. 그 단서가 되는 사건이 아버지가 지서장으로 근무하던 거제 동부지서 관내에서 발생했다.
해방 후 초유의 대규모 간첩단을 일망타진한 데에는 누구보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일선 경찰들의 노고가 컸다. 그러나 막상 사건이 종결되고 그에 대한 논공행상이 벌어지자 공은 중앙 상부의 높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일선에서 애쓴 경찰 하부조직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중앙의 높은 사람들은 승진도 하고 하사금도 받았다. 그러나 가장 땀 흘려 일한 하부조직에는 아무도 포상도 없었고, 있다 해도 극히 형식적인 치례에 그쳤다. 경찰 조직의 썩은 기강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곧은 성품은 썩고 비뚤어진 세태를 가만히 보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찰 수뇌부의 처사에 항의했다. 경찰과 같은 조직에서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의문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멸을 재촉하는 길이다.
처음에는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전신)에서 특사가 내려왔다. 특사는 아버지를 회유했다. 승진과 전보라는 달콤한 사탕도 가져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자신에게만 사탕을 내미는 치안 본부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다음은 사퇴 압력이었다. 아버지는 버텼다. 그러나 경찰 조직 내에서 일선 지서장 한 사람이 상부의 사퇴 압력에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정해진 운명처럼 경찰복을 벗었다.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잃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올곧고 강직하셨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버지는 헝클어지고 뒤틀린 세상에서 몸을 굽힐 줄 몰랐다. 아버지의 이런 성품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할아버지는 남원 향교에 적을 둔 유학자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남 함양에서 훈장으로 후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집안에는 유교적인 질서와 보수적인 분위기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올곧고 강직한 성품도 이런 집안의 정신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제 후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강요로 유학자들이 수난을 당할 때 할아버지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수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동경 유학길을 떠났다.
그리고 해방 후,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신학문을 배운 신생 국가의 젊은 사람들 앞에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던 시절이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독립국의 경찰이 출범하던 때를 맞추어 아버지는 경찰에 투신했다. 왜 하필 경찰이었을까. 일본 경찰에 당한 할아버지의 고난을 보상받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자신의 곧은 성품대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모범적인 경찰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품은 법을 준수하고 범법 행위를 단속하는 데는 유효하였으나 정작 자신이 살아갈 길을 밝히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굴신하고 부화하는 처세에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경찰에 몸담고 있는 동안 아버지는 무공훈장을 비롯하여 두 번이나 대통령 표창을 받았지만 훈장과 표창장도 세상을 헤쳐 나가는 지혜를 주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일본 오사카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후 오사카 철도국에서 일한 신여성이었다. 두 분 모두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지식인으로, 남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이 행복한 집안에 불행이 찾아든 것은 1970년대 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할머니 간첩단 사건’이 터지면서였다.
1972년 거제도에서 거물 간첩 유이화 사건이 터졌다. 고정간첩 유이화는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할머니였다. 아버지는 이 할머니를 체포, 심문하여 당시 국내에서 활약하고 있던 간첩 31명을 검거하는 대규모 전과를 올렸다. 그 단서가 되는 사건이 아버지가 지서장으로 근무하던 거제 동부지서 관내에서 발생했다.
해방 후 초유의 대규모 간첩단을 일망타진한 데에는 누구보다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무릅쓴 일선 경찰들의 노고가 컸다. 그러나 막상 사건이 종결되고 그에 대한 논공행상이 벌어지자 공은 중앙 상부의 높은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일선에서 애쓴 경찰 하부조직은 철저하게 소외됐다. 중앙의 높은 사람들은 승진도 하고 하사금도 받았다. 그러나 가장 땀 흘려 일한 하부조직에는 아무도 포상도 없었고, 있다 해도 극히 형식적인 치례에 그쳤다. 경찰 조직의 썩은 기강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곧은 성품은 썩고 비뚤어진 세태를 가만히 보고 있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찰 수뇌부의 처사에 항의했다. 경찰과 같은 조직에서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의문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멸을 재촉하는 길이다.
처음에는 치안본부(지금의 경찰청 전신)에서 특사가 내려왔다. 특사는 아버지를 회유했다. 승진과 전보라는 달콤한 사탕도 가져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개적으로 항명하는 자신에게만 사탕을 내미는 치안 본부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다음은 사퇴 압력이었다. 아버지는 버텼다. 그러나 경찰 조직 내에서 일선 지서장 한 사람이 상부의 사퇴 압력에 버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정해진 운명처럼 경찰복을 벗었다.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일자리를 잃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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