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거 결과는 전 국민을 놀라게 했다. 마가렛에게도 물론 쇼크였다. 영국 국민은 전쟁에서 국가를 승리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 윈스턴 처칠을 버리고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를 수상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영국 국민이 국가 존망의 위기를 구한 처칠을 버리고 평화가 돌아오자 노동당을 선택한 것은 영국 근대사의 극적 사건이었다.
“우리는 45년의 총선거에 놀랐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그 훌륭한 믿을 수 없을 만한 업적을 완수한 후에 국민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나중에 마가렛은 그날의 충격을 이야기했다. 이미 전쟁은 끝났다고 하여 전쟁 영웅의 목을 자른 것은 영국 국민의 지혜이기도 했다. 이때 마가렛은 선거의 두려움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배웠다.
애틀리 노동당 내각의 실현은 보수당 지지자인 마가렛에게 쇼크이긴 했으나, 나중의 그녀를 위해서는 플러스가 되었다. 이 내각은 마가렛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현실적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의원은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의원 월급만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했다. 의원은 어지간한 부자거나 노조 등 단체의 금전적 지원이 없으면 일할 수 없었다.
영국 정치 속에는 아마추어리즘의 전통이 있어, 정치는 정치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좋다고 보는 전통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이것은 의원이 명예직이었던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틀리 내각은 그 의원 보수를 대폭 인상하여 의원이 의원 월급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의원직이 정식 ‘직업’으로 처음으로 인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마가렛은 이렇게 말했다.
“의원에게 처음으로 생활급이 지급된 것입니다. 의원 월급이 연간 천 파운드로 인상되어 그때부터 (제가) 정치가의 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재산도 없고 게다가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있었다. 부유한 계급밖에 의원이 될 수 없는 제도 하에서 그녀가 정치가의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운명이지만 그녀가 정치가로 가는 길은 이때 노동당이 깔아주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막연히 정치가를 동경하던 기분은 한 친구의 21세 생일 파티에서 확실한 형태가 되었다. 파티도 파장에 접어들어 여성들이 주방에서 차와 샌드위치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마가렛은 여느 때처럼 정치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 한 명이 갑자기 마가렛을 향해 말했다.
“너의 진짜 목적은 국회의원이 되는 게 아니니?”
그 순간 마가렛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그 쇼크를 그녀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발언은 제가 하고 싶다고 바라던 모든 것을 한 순간 동안에 응축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소리 질렀어요. ‘그래, 되고 싶어’ 하고.”
이후 그녀의 관심은 정치 무대에 뛰어드는 데 집중된다. 20세를 겨우 지난 여자가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엉뚱하게 비칠 것이다. 그 때가 1946년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여성에게는 남이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중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친구들의 평판이나 소문보다 자신이 믿는 데 충실했다.
21세로 정치가로의 길을 선언했을 때 다시금 아버지의 말씀이 그녀의 가슴에 되살아났다.
“마가렛, 다른 사람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려고 해서는 안 돼. 무엇을 할 지는 자신이 결정하고 그에 따라오도록 남을 설득해야지.”
“우리는 45년의 총선거에 놀랐습니다. 윈스턴 처칠이 그 훌륭한 믿을 수 없을 만한 업적을 완수한 후에 국민들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하고 나중에 마가렛은 그날의 충격을 이야기했다. 이미 전쟁은 끝났다고 하여 전쟁 영웅의 목을 자른 것은 영국 국민의 지혜이기도 했다. 이때 마가렛은 선거의 두려움과 흥미로움을 동시에 배웠다.
애틀리 노동당 내각의 실현은 보수당 지지자인 마가렛에게 쇼크이긴 했으나, 나중의 그녀를 위해서는 플러스가 되었다. 이 내각은 마가렛이 국회의원이 될 수 있도록 현실적 조치를 취했기 때문이다.
그 때까지 의원은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의원 월급만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했다. 의원은 어지간한 부자거나 노조 등 단체의 금전적 지원이 없으면 일할 수 없었다.
영국 정치 속에는 아마추어리즘의 전통이 있어, 정치는 정치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좋다고 보는 전통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이것은 의원이 명예직이었던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애틀리 내각은 그 의원 보수를 대폭 인상하여 의원이 의원 월급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냈다. 의원직이 정식 ‘직업’으로 처음으로 인정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마가렛은 이렇게 말했다.
“의원에게 처음으로 생활급이 지급된 것입니다. 의원 월급이 연간 천 파운드로 인상되어 그때부터 (제가) 정치가의 길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재산도 없고 게다가 여성이라는 핸디캡을 있었다. 부유한 계급밖에 의원이 될 수 없는 제도 하에서 그녀가 정치가의 길을 갈 수는 없었다. 아이러니한 운명이지만 그녀가 정치가로 가는 길은 이때 노동당이 깔아주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막연히 정치가를 동경하던 기분은 한 친구의 21세 생일 파티에서 확실한 형태가 되었다. 파티도 파장에 접어들어 여성들이 주방에서 차와 샌드위치를 들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 마가렛은 여느 때처럼 정치를 화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자 친구 한 명이 갑자기 마가렛을 향해 말했다.
“너의 진짜 목적은 국회의원이 되는 게 아니니?”
그 순간 마가렛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그 쇼크를 그녀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발언은 제가 하고 싶다고 바라던 모든 것을 한 순간 동안에 응축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소리 질렀어요. ‘그래, 되고 싶어’ 하고.”
이후 그녀의 관심은 정치 무대에 뛰어드는 데 집중된다. 20세를 겨우 지난 여자가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엉뚱하게 비칠 것이다. 그 때가 1946년이라면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여성에게는 남이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중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친구들의 평판이나 소문보다 자신이 믿는 데 충실했다.
21세로 정치가로의 길을 선언했을 때 다시금 아버지의 말씀이 그녀의 가슴에 되살아났다.
“마가렛, 다른 사람이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무언가를 하려고 해서는 안 돼. 무엇을 할 지는 자신이 결정하고 그에 따라오도록 남을 설득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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