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비와 생활비는 그럭저럭 해결됐지만, 갈수록 고등학교는 처음부터 내가 올 곳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 무리해서 학교에 다닌다는 자책감이 공부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켰다. 가뜩이나 어려운 아버지에게 희생을 강요하면서 꼭 공부를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이유는 또 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나는 더 이상 전교 일등이 아니었다.
중학교 다닐 때 나는 만능이었다. 공부가 일등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웅변이든 글짓기든 일등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나는 거제도 한 귀퉁이에서 단연 스타였다.
그러나 마산은 확실히 큰물이었다. 경상남도 전역에서 중학교 수석 졸업생만 20명을 뽑아 만든 특별반에서 나는 더 이상 일등도 아니었고, 스타도 아니었다. 그저 가난하고 머리 좋은 촌놈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당연히 공부할 의욕도 줄어들었고 재미도 없었다.
내가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그래서 장난을 친 것일까.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특별반이 해체되었다. 특별반 학생들은 일반 학급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다.
이제 보통 아이들 속에서 주목받을 기회가 생긴 것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나 학비 면제가 취소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이 없어진 것이다.
고등학교 공부 자체도 흥미가 시들하던 참에 잘 됐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더니 차츰 커져갔다.
“아버지가 비싼 이자 물면서 빚낸 돈으로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질문을 던져놓고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다. 그럴 바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내 힘으로 돈을 벌고 기회가 닿으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자.”
나는 일단 마음을 굳히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을 정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라, 생각하고 결정한 후에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라.”
이것이 나의 행동 수칙이다.
나는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자퇴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소동을 불러왔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었던 많은 선생님이 저마다 한마디씩 충고와 걱정을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면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교감, 교장 그리고 이사장까지 동원되어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설득하는 이유를 자세히 듣고 보니 모두 학교의 일류대학 진학률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그런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소동은 집에서도 일어났다.
일본 유학 시절 고학이 얼마나 힘든가를 몸소 체험하신 아버지는 나의 ‘무작정 상경’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가난 때문에 아들이 그런 고생길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자책감도 아버지를 힘들게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번복하지 않는다.
누구의 설득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도 워낙 강력하게 반대해 그들의 설득과 만류를 뿌리치고 내 결심대로 고등학교를 그만두기까지 무려 한 달 반이나 걸렸다.
비로소 나는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전하고 평온한 작은 시냇물을 벗어나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거친 대해로 뛰어든 물고기 같은 신세였다.
이유는 또 있었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나는 더 이상 전교 일등이 아니었다.
중학교 다닐 때 나는 만능이었다. 공부가 일등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웅변이든 글짓기든 일등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나는 거제도 한 귀퉁이에서 단연 스타였다.
그러나 마산은 확실히 큰물이었다. 경상남도 전역에서 중학교 수석 졸업생만 20명을 뽑아 만든 특별반에서 나는 더 이상 일등도 아니었고, 스타도 아니었다. 그저 가난하고 머리 좋은 촌놈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당연히 공부할 의욕도 줄어들었고 재미도 없었다.
내가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을까. 그래서 장난을 친 것일까.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 특별반이 해체되었다. 특별반 학생들은 일반 학급으로 나뉘어 편입되었다.
이제 보통 아이들 속에서 주목받을 기회가 생긴 것은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그러나 학비 면제가 취소되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이 없어진 것이다.
고등학교 공부 자체도 흥미가 시들하던 참에 잘 됐다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더니 차츰 커져갔다.
“아버지가 비싼 이자 물면서 빚낸 돈으로 공부를 계속해야 하나?”
질문을 던져놓고 나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다. 그럴 바에는 서울에 올라가서 내 힘으로 돈을 벌고 기회가 닿으면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자.”
나는 일단 마음을 굳히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마음을 정하기 전에 충분히 생각하라, 생각하고 결정한 후에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가라.”
이것이 나의 행동 수칙이다.
나는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자퇴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소동을 불러왔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나에게 특별한 관심을 주었던 많은 선생님이 저마다 한마디씩 충고와 걱정을 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면 안 되는 이유가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교감, 교장 그리고 이사장까지 동원되어 나를 설득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설득하는 이유를 자세히 듣고 보니 모두 학교의 일류대학 진학률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그런 이유라면 그런 고등학교를 더 이상 다닐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소동은 집에서도 일어났다.
일본 유학 시절 고학이 얼마나 힘든가를 몸소 체험하신 아버지는 나의 ‘무작정 상경’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셨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가난 때문에 아들이 그런 고생길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자책감도 아버지를 힘들게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마음먹은 것은 번복하지 않는다.
누구의 설득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 어른들도 워낙 강력하게 반대해 그들의 설득과 만류를 뿌리치고 내 결심대로 고등학교를 그만두기까지 무려 한 달 반이나 걸렸다.
비로소 나는 울타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전하고 평온한 작은 시냇물을 벗어나 어디로 흘러갈지도 모른 채 무작정 거친 대해로 뛰어든 물고기 같은 신세였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