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내 관심을 끄는 학문은 정치학과 신학이었다. 가능하다면 두 학문을 모두 해보고 싶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신학은 삶의 경험이 좀더 풍부하게 쌓여 마음의 세계가 현실보다는 신들의 세계에 더 가까워진 무렵에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 하고 싶은 공부는 역시 정치학이었다.
나는 정치학이 정치인이 되는 기본 소양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해본 일이 없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학이다. 종합적인 사회과학이고, 모든 인문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정치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삶의 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최종 목표를 둔 학문이다. 정치의 역사, 정치의 과정, 정치의 형태, 제도의 기능, 정치사상은 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와 결부되어 있다. 그것이 내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했다.
그러나 정치 그 자체는 환멸과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정치가 주는 의미는 그랬다. 정치인이라는 인간군도 냉소와 모멸감 없이는 떠올리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인들을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화적 양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도 내 마음을 끌었다. 한국 정치의 문제를 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푸는 방법을 찾는 것, 그 과제가 내 마음을 붙들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삶의 질적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개선 방법을 찾는 학문, 내가 꿈꾼 정치학의 소박한 개념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나는 처음부터 국내 대학은 제쳐놓았다. 정치학, 특히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국제정치학이었다. 그래서 국제정치의 본바닥이자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장인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거라고 판단했다.
한국 유학생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처음 한동안은 강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원서를 읽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다행히 그 동안 쌓인 영어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았던 덕인지 고생한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뉴욕주립대 캠퍼스는 마치 연방교도소 같았다. 하지만 캠퍼스가 멋졌다 해도 어차피 내게는 감옥이었을 테니 상관없었다. 나는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강의실로 정해진 코스만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공부벌레였다. 미국 문화의 진수를 맛보고 문화적 충돌을 경험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차츰 두각이 나타나자 여학생들이 ‘똑똑한 동양 남자’ 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중 이란계 한 여학생의 저돌적인 육탄 공세는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남녀 관계에 관한 한 한국적 사고와 관습에 젖어 있는 나에게 그 같은 미국식 접근은 일종의 공포였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끝내 그런 공포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정치학은 재미있었다. 학문에 대한 내 관심과 상상력, 그리고 독서량에 교수들도 놀라워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치밀하게 해결하려는 자세와 함께 정치학 자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만약에 내가 정치 일선에 서는 날이 온다면 작게는 정부 기능의 개선과 크게는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멀고도 큰 시각에서 바라보고 일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주립대를 졸업할 때 나는 그 해 정치학과 졸업생 150명 중 유일하게 최우수 졸업생(Summa Cum Laude)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영어강사로 일해야 할 터였다. 미국 유학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귀국해 특강도 하고 영어교재도 출판하여 학비를 벌었다. 미국 유학은 영어강사인 나에게 더 많은 프리미엄을 가져다주었다. 국내 대학들은 영어 이론에 실전 경험까지 쌓은 내가 다시 대학가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싶었다. 내가 미국에서 어렵게 4년 동안 정치학을 공부한 것이 다시 영어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일은 언제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정치학이 정치인이 되는 기본 소양이라는 생각으로 접근해본 일이 없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학이다. 종합적인 사회과학이고, 모든 인문학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다. 정치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삶의 질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에 최종 목표를 둔 학문이다. 정치의 역사, 정치의 과정, 정치의 형태, 제도의 기능, 정치사상은 사회과학의 거의 모든 분야와 결부되어 있다. 그것이 내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했다.
그러나 정치 그 자체는 환멸과 같은 의미의 말이었다. 특히 한국에서 정치가 주는 의미는 그랬다. 정치인이라는 인간군도 냉소와 모멸감 없이는 떠올리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인들을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한국인이다. 그러므로 한국 정치의 후진적인 모습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화적 양태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도 내 마음을 끌었다. 한국 정치의 문제를 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푸는 방법을 찾는 것, 그 과제가 내 마음을 붙들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삶의 질적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개선 방법을 찾는 학문, 내가 꿈꾼 정치학의 소박한 개념은 그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대학에 진학할 것인가? 나는 처음부터 국내 대학은 제쳐놓았다. 정치학, 특히 내가 집중해서 공부하고 싶은 분야는 국제정치학이었다. 그래서 국제정치의 본바닥이자 민주주의의 거대한 실험장인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거라고 판단했다.
한국 유학생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처음 한동안은 강의 내용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원서를 읽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다행히 그 동안 쌓인 영어 지식이 다른 사람들보다 많았던 덕인지 고생한 기간은 비교적 짧았다.
뉴욕주립대 캠퍼스는 마치 연방교도소 같았다. 하지만 캠퍼스가 멋졌다 해도 어차피 내게는 감옥이었을 테니 상관없었다. 나는 기숙사에서 도서관으로, 도서관에서 강의실로 정해진 코스만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공부벌레였다. 미국 문화의 진수를 맛보고 문화적 충돌을 경험할 여유도 없었다.
내가 학교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차츰 두각이 나타나자 여학생들이 ‘똑똑한 동양 남자’ 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중 이란계 한 여학생의 저돌적인 육탄 공세는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남녀 관계에 관한 한 한국적 사고와 관습에 젖어 있는 나에게 그 같은 미국식 접근은 일종의 공포였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끝내 그런 공포를 일상으로 받아들일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정치학은 재미있었다. 학문에 대한 내 관심과 상상력, 그리고 독서량에 교수들도 놀라워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치밀하게 해결하려는 자세와 함께 정치학 자체를 조망하는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만약에 내가 정치 일선에 서는 날이 온다면 작게는 정부 기능의 개선과 크게는 국가와 인류의 미래를 멀고도 큰 시각에서 바라보고 일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뉴욕주립대를 졸업할 때 나는 그 해 정치학과 졸업생 150명 중 유일하게 최우수 졸업생(Summa Cum Laude)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영어강사로 일해야 할 터였다. 미국 유학에도 나는 방학 때마다 귀국해 특강도 하고 영어교재도 출판하여 학비를 벌었다. 미국 유학은 영어강사인 나에게 더 많은 프리미엄을 가져다주었다. 국내 대학들은 영어 이론에 실전 경험까지 쌓은 내가 다시 대학가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들의 기대를 거부하고 싶었다. 내가 미국에서 어렵게 4년 동안 정치학을 공부한 것이 다시 영어로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러나 세상일은 언제나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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