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당에서 (2)

    기고 / 시민일보 / 2007-04-15 19: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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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봉(변호사) 譯
    일류 정치가, 국가의 톱에 올라간 지도자는 한결같이 승부 운이 있었다. 정치의 계단을 오르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기회를 만난다. 비범한 정치가는 그 기회를 포착하여 크게 비약한다. 그래서 “운도 실력”이라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런 기회를 포착하려고 대처는 런던의 핀츨리(Finchley) 선거구에서 보수당 입후보자로 신청했다. 마침 1959년 총선거를 향한 후보자 선출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1935년이래 이 선거구에서 연속 당선했던 보수당 하원의원 존 크라우더(Sir John Crowder)가 은퇴 성명을 낸 직후에 신청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 선거구는 중산계급이 많아 오랫동안 보수당의 아성이었다. 그런 만큼 신청자가 몰렸고 신청자만 하여도 200명이 넘는 경쟁률이었다. 여기서 보수당 입후보자로 통과되면 하원 당선은 거의 확실했다.

    그녀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200명이었던 신청자는 제1차 전형에서 22명으로, 제2차 전형에서 4명으로 압축되었다. 옥스퍼드 졸업 등의 최고학력을 자랑하는 40대 전반인 젊은 남성 보수당 당원 3명과 33세의 특출하게 젊은 매력적인 여성 마가렛 대처가 남았다. 4명은 백명이 넘는 보수당 핀츨리 지부 평의원 앞에서 연설할 것을 요구 받았다. 3명의 남성들도 젊은 정치가로서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나 그 경력, 사고방식, 정책을 제시하는 방법 등이 낡은 정치가, 전통적 보수당 정치가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에 반해서 대처는 신선감을 주었다. 옥스퍼드 대학 졸업이라고는 해도 자신의 능력 하나로 스스로를 만들어낸 사람이었으며 게다가 여성인 점이 청량감을 주었다. 핀츨리 지구의 보수당 지지자들 중에 자영 비즈니스맨이나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중산계급이 된 자가 늘고 있었다는 점도 대처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능력에 의해 단련된 자신들과 대처의 살아가는 스타일이 겹쳐져서 그녀에게 공감했던 것이다.

    평의원에 의한 투표는 과반수를 얻는 자가 나올 때까지 투표를 반복하는 로마법왕 선출과 같은 시스템이 취해졌다. 1차 투표에서 대처는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압도적 과반수를 획득했다. 23세일 때 다트포드 선거구에서 보수당 입후보자가 되고 나서 10년 후 런던에서 다시 입후보자로 선출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의 출마는 10년 전보다 훨씬 유리했다. 지난번은 노동당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역이었고, 게다가 상대후보가 노동당의 현직 의원이었으나 이번은 현직 의원의 은퇴한 뒤의 선거였기 때문에 상대방도 신인이었으며 보수당의 지지세가 확고한 곳이었다.

    1959년의 하원선거에서 런던 핀츨리의 선거 결과는 대처의 대승이었다.

    마가렛 대처(보수당) 29,697표(53.2%), 에릭 디킨즈(노동당) 13,437표(24.1%), 헨리 스펜서(자유당) 12,701표(22.7%)

    마가렛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다. 정치가로서 언젠가 독립하겠다는 어릴 적부터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려고 결심하고 선거에 참가한 이래 10년만에 그 소원을 이룬 것이다. 그녀는 끝끝내 그 의지를 관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성취한 후에도 절대로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 성취되면 누구나 과거를 뒤돌아보며 감회에 젖을 것이다. 그러나 대처는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추억에 잠겨 과거를 뒤돌아 보는 사람은 비관주의자이고, 어떠한 과거에도 구애 받지 않는 자는 낙관주의자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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