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의 목적에 관하여서는 오래 전부터 응보형 이론과 교육형 이론이 있다. 응보형 이론은 죄를 저지른 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응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 응보는 괴로움이나 아픔이 수반된 것이어야 한다. 죄를 저지르면 응보가 있다는 걸 알아야 비로소 사람은 죄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형벌은 일종의 경고라는 것이다.
한편 교육형 이론이란 형벌은 죄를 저지른 자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교육적 목적을 가진다는 사고방식이다. 죄를 저지른 자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자로서, 형벌의 목적은 죄인을 선도한다는 교육적 효과에 있다고 본다.
대처는 확실히 응보형의 입장에 서있었다. 범죄자에게는 엄격한 처벌이 당연하며, 그 엄격함이야말로 재범이나 새로운 범죄자의 탄생을 막는 방패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범죄자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자’라는 견해를 피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흉포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반드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후 의회에서 체벌이나 사형 문제가 몇 번쯤 논의되었는데, 그녀는 항상 죄를 엄격하게 보는 측에 서서 사형제 부활을 지지했다. 의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으면서 여당 지도부와 대립하면서까지 체벌 강화를 지지한 것은 그녀의 신념에 따른 행위였다. 출발부터 그녀는 ‘신념의 여성’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1960년대는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관용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반핵이나 베트남전 반대의 물결이 영국을 엄습하여 온갖 권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가정을 지키고 엄격한 도덕률을 부과한 19세기적 중산계급의 이념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린 히피 현상을 허용하는 ‘관용의 사회’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대처의 이념과는 정반대였다.
그녀의 특징은 시대의 흐름에 무임승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머지 않아 자신의 이념을 요청하는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아마 그녀는 자기 신념에 투철하면 언젠가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가 온다고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자신이 소수파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언젠가는 다수파가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처가 의원으로서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는 시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경제 문제와 씨름하던 그녀에게 갑자기 맥밀런 수상이 만나자고 했다. 마침 언니인 뮤리엘과 식사하기로 했던 대처는 언니를 기다리게 한 채 수상 관저로 향했다. 맥밀런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연금국민보험성(年金國民保險省) 정무차관의 포스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보수당의 선전 여성적 존재였던 대처는 수상이 불렀을 때, 여왕의 연설에 호응하는 연설을 시킬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첫 당선 2년째인 신인 의원을 차관 포스트에 앉히겠다는 걸 대체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너무나 뜻밖이라 대처는 한 순간 멍한 상태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수상 관저에서 돌아온 대처는 언니 뮤리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스트가 제공되었을 때 그걸 받지 않으면 눈밖에 나버려요.”
대처로서는 8살인 아이들이 좀더 클 때까지 기다렸으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능력의 하나는 기회 포착에 민첩한 점이다. 그녀의 정치적 장래를 보나, 영국으로 보나, 나아가서는 시대적으로 보아 도움이 되는지를 순식간에 순식간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한편 교육형 이론이란 형벌은 죄를 저지른 자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교육적 목적을 가진다는 사고방식이다. 죄를 저지른 자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자로서, 형벌의 목적은 죄인을 선도한다는 교육적 효과에 있다고 본다.
대처는 확실히 응보형의 입장에 서있었다. 범죄자에게는 엄격한 처벌이 당연하며, 그 엄격함이야말로 재범이나 새로운 범죄자의 탄생을 막는 방패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범죄자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자’라는 견해를 피해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많은 흉포한 범죄를 저지르는 자가 반드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후 의회에서 체벌이나 사형 문제가 몇 번쯤 논의되었는데, 그녀는 항상 죄를 엄격하게 보는 측에 서서 사형제 부활을 지지했다. 의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으면서 여당 지도부와 대립하면서까지 체벌 강화를 지지한 것은 그녀의 신념에 따른 행위였다. 출발부터 그녀는 ‘신념의 여성’으로 행동했던 것이다.
1960년대는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관용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반핵이나 베트남전 반대의 물결이 영국을 엄습하여 온갖 권위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것은 가정을 지키고 엄격한 도덕률을 부과한 19세기적 중산계급의 이념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린 히피 현상을 허용하는 ‘관용의 사회’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대처의 이념과는 정반대였다.
그녀의 특징은 시대의 흐름에 무임승차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머지 않아 자신의 이념을 요청하는 시대가 온다는 확신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아마 그녀는 자기 신념에 투철하면 언젠가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가 온다고 믿음으로써 스스로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자신이 소수파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으나, 언젠가는 다수파가 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처가 의원으로서 권력의 달콤함을 맛보는 시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경제 문제와 씨름하던 그녀에게 갑자기 맥밀런 수상이 만나자고 했다. 마침 언니인 뮤리엘과 식사하기로 했던 대처는 언니를 기다리게 한 채 수상 관저로 향했다. 맥밀런의 이야기는 그녀에게 연금국민보험성(年金國民保險省) 정무차관의 포스트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보수당의 선전 여성적 존재였던 대처는 수상이 불렀을 때, 여왕의 연설에 호응하는 연설을 시킬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첫 당선 2년째인 신인 의원을 차관 포스트에 앉히겠다는 걸 대체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너무나 뜻밖이라 대처는 한 순간 멍한 상태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수상 관저에서 돌아온 대처는 언니 뮤리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포스트가 제공되었을 때 그걸 받지 않으면 눈밖에 나버려요.”
대처로서는 8살인 아이들이 좀더 클 때까지 기다렸으면 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치적 능력의 하나는 기회 포착에 민첩한 점이다. 그녀의 정치적 장래를 보나, 영국으로 보나, 나아가서는 시대적으로 보아 도움이 되는지를 순식간에 순식간에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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