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논쟁이나 분쟁이 있을 때 주장의 타당함이나 논리의 우열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큰소리로 끝까지 우기는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다. 그리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기’가 있어야 이긴다고 한다. 이 모두 서로의 요구나 주장을 따져 알기보다는 누가 먼저 상대를 제압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리라.
이것은 모든 상황에 통하는 말일까? 시종일관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싸움이라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싸움에는 항상 우열이 있고 승패가 있다. 스포츠 세계에서도,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꼭 구분되지 않아도 좋을 때가 많다. 도무지 끝이 없을 듯 열을 올려 싸우는 와중에도 타협점을 찾는 협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승자 대 패자가 아니라 모두가 이기는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이란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접점을 찾아 조율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뭘로 할까?”
“난 구수한 된장찌개 생각이 나네.”
“그래? 난 오늘 고기를 먹었음 싶은데.”
“그럼, 오늘 점심은 된장찌개 먹고 저녁에 같이 고기 먹으러 갈까?”
이처럼 일상에서도 알게 모르게 협상을 하며 산다. 협상은 사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아침식사부터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학교나 직장, 가정에서도 협상과 타협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도 협상이며, 집을 사고파는 것 또한 협상이다. 좁게는 친구와 주변 사람들의 범주에서, 크게는 개인과 기업, 기업과 기업 또는 국가와 국가 간에 협상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나라 간의 통상 협상이나 전 세계적인 관심사를 다루는 우루과이라운드 역시 협상이다. 협상과 타협은 단순히 거래를 하고 어떤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기술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 전반에 깔려 있는 반복적 사이클이다.
옷을 고르는 손님과 옷가게 주인이 흥정을 하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자. 손님은 옷이 마음에 들지만 가격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얼마예요?”
“3만4000원이에요.”
“어머, 너무 비싸요.”
이때 주인이 ‘이 옷 하나 팔아봤자 남는 것도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요’하며 일언지하에 더 이상의 흥정을 거절한다면 거래는 없는 것이 된다. 만약 이 옷가게 주인이 협상에 능한 장사꾼이라면, 손님에게 이런 제의를 하며 흥정을 계속했을 것이다.
“3만 4000원에 팔아봤자 사실 얼마 남지도 않아요.”
“그래도 너무 비싸다.”
“에이, 좋수다. 내가 눈 딱 감고 4000원 빼드릴게. 남는 거 없이 파는 거요. 대신 손님께서는 우리 집 단골 하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가 오고간다면 손님은 기분 좋게 그 옷을 집어들 것이다. 협상은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한 방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쪽이 얻는 것이 있다면 나머지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본다’ 또는 ‘최대한 좋은 것을 취하고 최소한 양보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협상은 일방적인 얻음과 잃음의 대비가 아니라 공평하게 주고받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또한 협상의 과정과 절차는 쌍방 모두에게 만족스러워야 하며, 협상 전 과정에 걸쳐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협상 전문가를 키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또 협상의 제도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협상의 분위기를 조생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자와 패자가 엄연한 게임에서는 극단적인 이분법과 흑백논리밖에는 있을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모두가 살고 모두가 승자가 되는 협상이라는 윈윈 전략을 알아야 할 시점이 됐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상황에 통하는 말일까? 시종일관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싸움이라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수도 있을 것이다. 싸움에는 항상 우열이 있고 승패가 있다. 스포츠 세계에서도, 동물들의 세계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꼭 구분되지 않아도 좋을 때가 많다. 도무지 끝이 없을 듯 열을 올려 싸우는 와중에도 타협점을 찾는 협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승자 대 패자가 아니라 모두가 이기는 협상이 필요하다. 협상이란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 접점을 찾아 조율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오늘 점심은 뭘로 할까?”
“난 구수한 된장찌개 생각이 나네.”
“그래? 난 오늘 고기를 먹었음 싶은데.”
“그럼, 오늘 점심은 된장찌개 먹고 저녁에 같이 고기 먹으러 갈까?”
이처럼 일상에서도 알게 모르게 협상을 하며 산다. 협상은 사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아침식사부터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학교나 직장, 가정에서도 협상과 타협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시장에서 물건 값을 흥정하는 것도 협상이며, 집을 사고파는 것 또한 협상이다. 좁게는 친구와 주변 사람들의 범주에서, 크게는 개인과 기업, 기업과 기업 또는 국가와 국가 간에 협상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나라 간의 통상 협상이나 전 세계적인 관심사를 다루는 우루과이라운드 역시 협상이다. 협상과 타협은 단순히 거래를 하고 어떤 협력 관계를 이끌어내는 특별한 기술만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 전반에 깔려 있는 반복적 사이클이다.
옷을 고르는 손님과 옷가게 주인이 흥정을 하고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자. 손님은 옷이 마음에 들지만 가격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 하고 있다.
“얼마예요?”
“3만4000원이에요.”
“어머, 너무 비싸요.”
이때 주인이 ‘이 옷 하나 팔아봤자 남는 것도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봐요’하며 일언지하에 더 이상의 흥정을 거절한다면 거래는 없는 것이 된다. 만약 이 옷가게 주인이 협상에 능한 장사꾼이라면, 손님에게 이런 제의를 하며 흥정을 계속했을 것이다.
“3만 4000원에 팔아봤자 사실 얼마 남지도 않아요.”
“그래도 너무 비싸다.”
“에이, 좋수다. 내가 눈 딱 감고 4000원 빼드릴게. 남는 거 없이 파는 거요. 대신 손님께서는 우리 집 단골 하는 겁니다.”
이렇게 얘기가 오고간다면 손님은 기분 좋게 그 옷을 집어들 것이다. 협상은 살아가면서 원하는 것을 얻는 한 방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쪽이 얻는 것이 있다면 나머지 한쪽은 반드시 손해를 본다’ 또는 ‘최대한 좋은 것을 취하고 최소한 양보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협상은 일방적인 얻음과 잃음의 대비가 아니라 공평하게 주고받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또한 협상의 과정과 절차는 쌍방 모두에게 만족스러워야 하며, 협상 전 과정에 걸쳐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 협상 전문가를 키우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또 협상의 제도화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협상의 분위기를 조생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승자와 패자가 엄연한 게임에서는 극단적인 이분법과 흑백논리밖에는 있을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모두가 살고 모두가 승자가 되는 협상이라는 윈윈 전략을 알아야 할 시점이 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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