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 나중에 신념의 정치가라는 말을 듣는 대처의 진수를 볼 수 있다. ‘확고한 신념’이야말로 대처의 트레이드 마크이며, 장기 정권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대처에게 리더의 능력이란 오합지졸에게 아양을 떠는 게 아니라, 하나의 강력한 방향을 제시하고 거기로 사람들을 끌어가는 실력이었다. 대화에 의한 타협이라는 정치 기술보다 이 국가에 가장 필요한 이념과 정책을 내세우고, 그 아래 모이도록 사람들에게 호소하며 또한 그들을 유도하는 것이 리더의 일이었다. 그것은 대중정치라기보다 오히려 귀족정치라 불러야 할 것이었다.
중산계급의 가장 낮은 데서 출발하여 그 능력만으로 영국 정치의 중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이 되었던 것이다.
1970년에 보수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5년간 대처에게 공적 생활에서의 행운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사적인 생활에서는 하나의 슬픈 사건이 있었다. 총선거 3개월 전 그녀가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던 알프렛 로버트가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 알프렛이야말로 그녀를 정치에 눈뜨게 만들어, 신념의 정치가로 기른 은사였다. 수상이 되고 나서도 종종 ‘파파’ 또는 가볍게 ‘파’라 불러 아버지를 화제로 삼을 정도로 그녀는 아버지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버지는 지금 제가 믿고 있는 것을 믿게 하도록 교육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제가 선거에서 호소하여 쟁취하려는 가치인 것입니다. 작은 거리의 검소한 가정에서 제가 배운 것이 선거를 승리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아버지 덕분입니다.”
의원이 되고 나서도 그녀는 놀랄 만큼 바뀌지 않았다. 그 정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정치 현실 속에서 달라져가는 것에 비해 그녀의 변화는 거의 없다. 인생의 스승이며 정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 말고는 그녀는 배울만한 사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는 젊어서 ‘만들어진 정치가’였다.
1970년 6월 총선거의 결과는 대처에게 새로운 시련을 주게 되었다. 보수당이 승리하여 히스는 대처를 교육과학장관(교육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수상 직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장관 자리는 결코 기분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극히 제한되었고 거기에 겹쳐서 예산이 삭감되는 불운한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대처가 교육장관이 된 시기에 그래머 스쿨을 폐지하고 컴프리헨시브 스쿨(Com prehensive School)로 전환하는 노동당 시대의 교육 개혁이 논의의 촛점이 되어 있었다. 이전의 공립학교제도에서는 11세가 되면 ‘일레븐 플러스’라는 시험으로 상급 그래머 스쿨에 가거나, 보통 중학이라 할 수도 있는 세컨더리 스쿨 내지는 전문학교에 가는 두 가지 코스로 나누어졌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인 그래머 스쿨과 달리 세컨더리 스쿨이나 전문학교는 거기를 마치면 즉시 사회에 나가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사립 퍼블릭 스쿨에 들어가지만, 돈이 없고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그래머 스쿨에 들어가서 사회 계층의 계단을 올라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11세로 ‘일레븐 플러스’에 의해 평생의 길을 결정해야 했다.
이래서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라, 성숙하지 않은 학생에게서 기회를 빼앗는 셈이 된다. 즉 교육의 평등주의가 손상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노동당은 그래머 스쿨을 폐지하고 대신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종합 중학·고교, 즉 컴프리헨시브 스쿨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중산계급의 가장 낮은 데서 출발하여 그 능력만으로 영국 정치의 중심으로 올라온 그녀는 일종의 정신적 귀족이 되었던 것이다.
1970년에 보수당이 승리할 때까지의 5년간 대처에게 공적 생활에서의 행운이 붙어 다녔다. 하지만 사적인 생활에서는 하나의 슬픈 사건이 있었다. 총선거 3개월 전 그녀가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던 알프렛 로버트가 사망한 것이다. 아버지 알프렛이야말로 그녀를 정치에 눈뜨게 만들어, 신념의 정치가로 기른 은사였다. 수상이 되고 나서도 종종 ‘파파’ 또는 가볍게 ‘파’라 불러 아버지를 화제로 삼을 정도로 그녀는 아버지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고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이렇게 술회했다.
“아버지는 지금 제가 믿고 있는 것을 믿게 하도록 교육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 제가 선거에서 호소하여 쟁취하려는 가치인 것입니다. 작은 거리의 검소한 가정에서 제가 배운 것이 선거를 승리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은 아버지 덕분입니다.”
의원이 되고 나서도 그녀는 놀랄 만큼 바뀌지 않았다. 그 정치 스타일이나 사고방식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의원들이 정치 현실 속에서 달라져가는 것에 비해 그녀의 변화는 거의 없다. 인생의 스승이며 정치의 스승이었던 아버지 말고는 그녀는 배울만한 사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녀는 젊어서 ‘만들어진 정치가’였다.
1970년 6월 총선거의 결과는 대처에게 새로운 시련을 주게 되었다. 보수당이 승리하여 히스는 대처를 교육과학장관(교육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수상 직을 제외하면 그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장관 자리는 결코 기분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극히 제한되었고 거기에 겹쳐서 예산이 삭감되는 불운한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대처가 교육장관이 된 시기에 그래머 스쿨을 폐지하고 컴프리헨시브 스쿨(Com prehensive School)로 전환하는 노동당 시대의 교육 개혁이 논의의 촛점이 되어 있었다. 이전의 공립학교제도에서는 11세가 되면 ‘일레븐 플러스’라는 시험으로 상급 그래머 스쿨에 가거나, 보통 중학이라 할 수도 있는 세컨더리 스쿨 내지는 전문학교에 가는 두 가지 코스로 나누어졌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인 그래머 스쿨과 달리 세컨더리 스쿨이나 전문학교는 거기를 마치면 즉시 사회에 나가 직업을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사립 퍼블릭 스쿨에 들어가지만, 돈이 없고 머리가 좋은 아이들은 그래머 스쿨에 들어가서 사회 계층의 계단을 올라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11세로 ‘일레븐 플러스’에 의해 평생의 길을 결정해야 했다.
이래서는 아이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할 뿐만 아니라, 성숙하지 않은 학생에게서 기회를 빼앗는 셈이 된다. 즉 교육의 평등주의가 손상된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노동당은 그래머 스쿨을 폐지하고 대신에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종합 중학·고교, 즉 컴프리헨시브 스쿨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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