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처라는 정치가는 지금까지의 보수당 지도자에 비해 두 가지 점에서 확실하게 달랐다. 하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여자라는 점이다. 아무리 여성의 사회 진출이 현저한 영국이라고는 해도 여성 정치가는 항상 ‘여성’이라는 관사가 붙어 있었다. “여자인 주제에”라는 멸시하는 말이야 없었으나, 여성인 탓으로 특이한 눈으로 보인 점도 있었다. 그것은 여성의 사회 진출도 드디어 정치에까지 이르렀다는 감탄과 개탄이 뒤섞인 것이었다.
두 번째는 그녀가 취미나 유머 감각도 가지지 않은 비 아마추어적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영국 보수 정치가의 전통에는 아마추어리즘이 엄연히 존재한다. 정치는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는 전통이다. 그것은 정치는 서민 감각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했다. 영국 보수 정치가의 대부분은 상류계급 출신이나 고생 끝에 상류계급에 들어선 성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역으로 서민에 대한 감각적 접근을 좋다고 보는 풍조를 낳았다.
그들이 아마추어를 자랑으로 삼은 것은 인간 폭의 넓이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 정치에만 묶이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국민을 통치할 수 있다는 귀족적 사고의 표현이기도 했다. 처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고 아마추어 화가이며, 히스는 요트맨이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기도 했다. 취미의 넓이는 그대로 보수 정치가의 폭을 의미하고 있었다.
유머도 역시 보수 정치가에게 불가결한 것이었다. 하나의 연설에서 청중을 웃길 수 없는 자는 정치가로서 실격으로 보는데 보수당에서 특히 그랬다. 매서운 추궁을 유머로 되받아 치는 전술은 의회 답변에 선 각료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원래 유머는 정신적 여유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여부는 인간적인 크기와 관련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처의 경우 취미는 ‘일’이라 할 정도로 비 영국인적이었으며, 유머 센스 부족이라는 점에서도 이름났다. 오로지 정치로, 정치로 전력 투구하는 프로 정치가였다. 타협이나 거래가 능숙하다는 의미에서의 프로 정치가가 아니다. 정치 말고는 눈을 돌릴 수 없는 인간, 정치를 생업으로 하는 프로이다.
아마추어리즘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그녀의 인간적 폭이 좁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누구나 그녀의 머리 회전이 빠른 것이나 결단력, 의지력에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인간적인 폭에 감동했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보수당 정치가와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왜 그 정도로 이단적인 정치가가 리더가 될 수 있었는가? 역사적인 우연이라 할 수도 있는데, 대처에게는 이 역사적 우연을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만일 그녀에게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찬스를 찬스로 파악하는 실력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었다. 그녀는 반 평생 동안에 꼭 세 번 이 결정적 찬스를 포착하여 이것을 발판으로 도약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세 번 도약했을 때 그녀는 영국의 확고한 리더가 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정치가가 되기 위해 선거에 나섰을 때, 두 번째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순간이었다.
히스 내각은 ‘그림자 내각’ 시절에 런던 교외의 셀스돈 파크 호텔(Selsdon Park Hotel)에서 채택한 ‘셀스돈 선언’에 의거, 영국 경제의 적극적 확대 정책을 채용해왔다. 레임덕이 된 기업을 잘라버리고, 경쟁에 견딜 수 있는 체질로 개선을 겨냥한 것이다. 셀스돈 선언의 캐치프레이즈 “자립하라”를 선거 슬로건으로 삼아 승리한 히스는 경쟁에 이길 수 있는 강한 기업의 출현을 요구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두 번째는 그녀가 취미나 유머 감각도 가지지 않은 비 아마추어적 정치가였다는 점이다. 영국 보수 정치가의 전통에는 아마추어리즘이 엄연히 존재한다. 정치는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는 전통이다. 그것은 정치는 서민 감각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리이기도 했다. 영국 보수 정치가의 대부분은 상류계급 출신이나 고생 끝에 상류계급에 들어선 성공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역으로 서민에 대한 감각적 접근을 좋다고 보는 풍조를 낳았다.
그들이 아마추어를 자랑으로 삼은 것은 인간 폭의 넓이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정치가로서 정치에만 묶이지 않는 인간이야말로 국민을 통치할 수 있다는 귀족적 사고의 표현이기도 했다. 처칠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고 아마추어 화가이며, 히스는 요트맨이고 오케스트라 지휘자이기도 했다. 취미의 넓이는 그대로 보수 정치가의 폭을 의미하고 있었다.
유머도 역시 보수 정치가에게 불가결한 것이었다. 하나의 연설에서 청중을 웃길 수 없는 자는 정치가로서 실격으로 보는데 보수당에서 특히 그랬다. 매서운 추궁을 유머로 되받아 치는 전술은 의회 답변에 선 각료에게는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원래 유머는 정신적 여유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지 여부는 인간적인 크기와 관련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처의 경우 취미는 ‘일’이라 할 정도로 비 영국인적이었으며, 유머 센스 부족이라는 점에서도 이름났다. 오로지 정치로, 정치로 전력 투구하는 프로 정치가였다. 타협이나 거래가 능숙하다는 의미에서의 프로 정치가가 아니다. 정치 말고는 눈을 돌릴 수 없는 인간, 정치를 생업으로 하는 프로이다.
아마추어리즘의 전통에서 벗어난 것은 그녀의 인간적 폭이 좁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누구나 그녀의 머리 회전이 빠른 것이나 결단력, 의지력에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인간적인 폭에 감동했다는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보수당 정치가와는 전혀 이질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러면 왜 그 정도로 이단적인 정치가가 리더가 될 수 있었는가? 역사적인 우연이라 할 수도 있는데, 대처에게는 이 역사적 우연을 자신의 손안에 넣을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만일 그녀에게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이 찬스를 찬스로 파악하는 실력이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었다. 그녀는 반 평생 동안에 꼭 세 번 이 결정적 찬스를 포착하여 이것을 발판으로 도약했다. 정치의 세계에서 세 번 도약했을 때 그녀는 영국의 확고한 리더가 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정치가가 되기 위해 선거에 나섰을 때, 두 번째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순간이었다.
히스 내각은 ‘그림자 내각’ 시절에 런던 교외의 셀스돈 파크 호텔(Selsdon Park Hotel)에서 채택한 ‘셀스돈 선언’에 의거, 영국 경제의 적극적 확대 정책을 채용해왔다. 레임덕이 된 기업을 잘라버리고, 경쟁에 견딜 수 있는 체질로 개선을 겨냥한 것이다. 셀스돈 선언의 캐치프레이즈 “자립하라”를 선거 슬로건으로 삼아 승리한 히스는 경쟁에 이길 수 있는 강한 기업의 출현을 요구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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