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패배에서 3일 후인 13일,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의 집에 모인 보수당 우파 그룹은 히스가 지도자인 한 보수당 재생의 희망은 없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히스 정권 하에서 보수당 본래의 자유주의적 경제학이 억압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히스의 두 번의 패배를 기회로 보수당 본래의 이념을 내거는 지도자를 세우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인사 면에서 우파가 푸대접 받았다는 불만도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히스의 후계자로 먼저 첫째로 키스 조셉이 꼽혔는데, 듀칸 “1922년 위원회” 위원장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대처의 이름도 한 순간 나오기는 나왔으나 대부분은 무시했다.
그날 밤 리들리 집에서의 결론은 조셉에게 출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어, 즉시 조셉에게 전화하여 일어서기를 촉구했다.
은근히 이것을 예상, 아니 기대하던 조셉은 전화에서 한 순간 생각하는 척 했으나 금방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리더 후보자로 (당수 선출) 선거가 실시될 때는 후보자가 되겠소. 이 점에 질문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해줘도 괜찮습니다.”
마침내 조셉은 히스와 대결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다음날인 14일 “1922년 위원회”의 모임이 듀칸 위원장의 자택에서 열렸다. “1922년 위원회”는 1922년에 당원이 반란을 일으켜 당수 오스틴 체임벌린을 추방했을 때의 주요 멤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로는 1923년에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일반 당원에게 영향이 있는 당 운영 사항에 대해 의논하여 일반 당원의 의사를 당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원 중에서 선출된 18명의 의원에 의해 구성되는데, 평소에는 활동 정지 상태라 해도 되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날의 위원회도 총선거 후 새 의회에서의 대책을 짠다는 매우 일반적인 모임이었다. 그러나 위원회 개최 소식을 들은 신문기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반 당원의 목소리가 집약된 “1922년 위원회”가 히스에게 퇴진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한 것이다. 바로 50년 이상 전에 이 위원회의 설립자가 당수를 추방한 것처럼. 그런 기대를 가진 기자들이 속속 듀칸의 집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의 기대에 반해 위원회는 1922년처럼 히스 추방을 결의는 하지 않았다.
역으로 히스 당수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당수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두 번 패배했지만 현 시점에 당수 선거를 하면 히스가 재선될 것은 확실했다.
그날 오후 듀칸 위원장은 히스에게 전화를 걸어 회견을 요청했다. 위원회의 결론을 히스에게 설명하여 당수 선거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회견은 짧은 시간 만에 소득 없이 끝났다. 히스가 당수 선거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히스는 위원회의 당수 선거 권고를 자신에 대한 반란이며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스로서는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이때의 히스 비판은 그의 전술적 실패, 독단적 스타일에 대한 반발에 불과했고, 당내의 과반수는 여전히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히스 말고는 당수가 될 사람은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판단이어서, 히스가 입후보하면 재선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러나 히스가 당수 선거를 거부한 순간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히스의 리더로서의 자격을 다시 따지자는 의견이 당내에서 급격히 강해진 것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히스의 후계자로 먼저 첫째로 키스 조셉이 꼽혔는데, 듀칸 “1922년 위원회” 위원장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 대처의 이름도 한 순간 나오기는 나왔으나 대부분은 무시했다.
그날 밤 리들리 집에서의 결론은 조셉에게 출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되어, 즉시 조셉에게 전화하여 일어서기를 촉구했다.
은근히 이것을 예상, 아니 기대하던 조셉은 전화에서 한 순간 생각하는 척 했으나 금방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리더 후보자로 (당수 선출) 선거가 실시될 때는 후보자가 되겠소. 이 점에 질문을 받으면 누구에게나 그렇게 말해줘도 괜찮습니다.”
마침내 조셉은 히스와 대결할 의사를 밝혔던 것이다.
다음날인 14일 “1922년 위원회”의 모임이 듀칸 위원장의 자택에서 열렸다. “1922년 위원회”는 1922년에 당원이 반란을 일으켜 당수 오스틴 체임벌린을 추방했을 때의 주요 멤버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실제로는 1923년에 결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일반 당원에게 영향이 있는 당 운영 사항에 대해 의논하여 일반 당원의 의사를 당수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원 중에서 선출된 18명의 의원에 의해 구성되는데, 평소에는 활동 정지 상태라 해도 되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날의 위원회도 총선거 후 새 의회에서의 대책을 짠다는 매우 일반적인 모임이었다. 그러나 위원회 개최 소식을 들은 신문기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반 당원의 목소리가 집약된 “1922년 위원회”가 히스에게 퇴진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고 착각한 것이다. 바로 50년 이상 전에 이 위원회의 설립자가 당수를 추방한 것처럼. 그런 기대를 가진 기자들이 속속 듀칸의 집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들의 기대에 반해 위원회는 1922년처럼 히스 추방을 결의는 하지 않았다.
역으로 히스 당수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당수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비록 두 번 패배했지만 현 시점에 당수 선거를 하면 히스가 재선될 것은 확실했다.
그날 오후 듀칸 위원장은 히스에게 전화를 걸어 회견을 요청했다. 위원회의 결론을 히스에게 설명하여 당수 선거를 실시하도록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회견은 짧은 시간 만에 소득 없이 끝났다. 히스가 당수 선거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이다.
히스는 위원회의 당수 선거 권고를 자신에 대한 반란이며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히스로서는 결정적인 잘못이었다. 이때의 히스 비판은 그의 전술적 실패, 독단적 스타일에 대한 반발에 불과했고, 당내의 과반수는 여전히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히스 말고는 당수가 될 사람은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판단이어서, 히스가 입후보하면 재선될 것은 거의 확실했다.
그러나 히스가 당수 선거를 거부한 순간부터 흐름이 바뀌었다. 히스의 리더로서의 자격을 다시 따지자는 의견이 당내에서 급격히 강해진 것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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