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닝 가 10번지를 목표로 (12)

    기고 / 시민일보 / 2007-06-14 16:3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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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봉(변호사) 譯
    대처는 수상이 되고 나서 몇 번이나 내각 내 분열과 당내 대립 사태를 당했다. 그러나 사임 태세를 보인 적은 없다. 오히려 대처리즘의 수행을 위해 적어도 두 번은 연임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이다.

    그러면 대처는 일구이언을 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장래 자신의 언질을 위약하는 경우가 되더라도, 지금의 찬스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지금이야말로 그림자 내각의 의견을 통일하여 노동당을 공격해야 할 때라고 믿고 있었다. 단호하게 싸울 자세를 취하는 것이야말로 당수에게 부과된 책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공격에서 전후 가장 뛰어난 보수당 당수”라는 대처가 찬스를 잡았을 때 보여주는 본능적이라 해도 될 투쟁심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불신임 안은 결국 부결되었다.

    그러나 이 소동에 싫증이 났는지 윌슨 수상이 갑자기 사의를 표명하고 대신 외무장관인 제임스(애칭 짐) 캘러헌(Callahan)이 후임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캘러헌 새 수상은 대처에게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의 웃는 얼굴은 정말이지 천진한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성격도 밝아 음침한 윌슨과는 대조적이었다. ‘서니 짐(Sunny Jim)’이라는 애칭으로 개인적인 인기도 윌슨 시절보다 훨씬 좋았다.

    그러나 개인적 인기를 얻어도 운이 따르지 않았다. 경제지표는 악화 일로였으며 파운드 화도 대 폭락이었다.

    마침내 노동당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서의 차입을 결의하고 긴축 예산을 짰으나 당내의 반발을 사고, 또 지방분권 법안에서도 당내 분열을 일으켰다.

    대처는 이 때 다시 불신임 안의 제출에 나선다. 77년 7월 처음으로 노동당 정부에 불신임 안을 들이대고 나서 꼭 1년 후의 일이었다.

    이대로 놓아두면 불신임 안이 가결될 우려가 있다고 본 캘러헌은 야당 자유당과의 연합을 기도했다. 자유당에게 정책 포스트는 주지 않고 정책 협정에 의해 자유당의 정책을 받아들이고자 한 것이다. 이에 의해 자유당의 지지를 받아 캘러헌은 간신히 불신임 안을 부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협정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다음해 78년 여름 자유당의 스틸 당수가 협정에 대한 환멸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의해 노동당 정권의 기반이 흔들려 이 해 가을에는 해산=총선거가 있다는 예측이 일반적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IMF에서의 차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시한 긴축 정책 덕분에 약간이지만 인플레율이 내려갔다. 노동당에 유리한 정세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니 짐’의 밝은 인품이 여전히 국민들에게 통하고 있었다.

    1978년 10월 캘러헌은 BBC방송에 대해 5분간의 수상 연설 시간을 할애하도록 요청했다. 일반은 이것을 의회 해산을 발표하는 것으로 보아, 야당 각 당이 모두 선거전에 나설 태세에 들어갔다. 매스컴도 일제히 선거 특집을 준비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에 나타난 캘러헌은 “지금 정부에 부과된 사명은 현재의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했다.

    국민의 기대는 벗어났다. 그러나 이 방송에 의해 캘러헌 자신의 기대도 역시 벗어났다.

    이 시기에 만일 캘러헌이 해산을 단행했으면 노동당이 이겼을 것이라는 게 일반의 견해이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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