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대처 파 중에서도 그녀가 어디까지나 현재의 경제정책에 고집한다면 사민당으로 옮기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자가 나왔다.
그러나 통화주의를 추진하는 대처는 굴복할 기색도 없이 통화주의 예산 편성에 부심했다. 대처 내각 성립이래 세 번째인 이 예산안은 공공지출을 43억 파운드 더 삭감하고, 공공부문 적자(PSBR)를 13조 5000억 파운드에서 10조 5000억 파운드로 내리는 초 긴축 예산이었다. 대처는 이것을 의회 제출일인 3월10일 아침에야 비로소 각의에 상정하는 아슬아슬한 일을 해치웠다. 다음 연도의 예산안을 의회 상정 일까지 각의에도 상정하지 않는다는 예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각 내의 반대 목소리를 봉쇄하여 만든 디플레 예산이다. 반 대처 파의 각료는 경악함과 동시에 매우 화가 났다. 프라이어, 워커, 길모어의 세 각료는 즉시 격렬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세 명만큼은 아니었으나 핌, 칼라일, 영거 등의 각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대처를 편든 것은 겨우 화이트로뿐이었다.
대처 비판 파는 예산안을 받아들이거나 사임하는 양자택일을 강요 당했다. 이미 의회에 예산안이 제출된 이상 예산안 변경은 무리였다. 대처와 결별하고 내각을 떠나 당내 반란을 기도하거나, 아니면 예산안을 인정하여 집단 책임을 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판 파에는 대처와 같은 신념의 사나이가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이 예산안을 승인했다. 이후 그들은 이 미적지근한 태도에서 “웨트(wet)”라 부르게 되고, 대처 파는 “드라이(dry)”라 부르게 되었다. 웨트 파의 일부는 금후 대처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아 자멸할 것으로 읽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예산에 의해 경제 위기는 점점 더 심각해져 머지않아 사임으로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예산안을 의회 제출일의 아침에야 각의에 상정하는 대처의 기발한 책략은 말하자면 위에서의 쿠데타라 할 수 있었으나 보기 좋게 성공했다. 만일 이때 예산안을 각의에서 충분히 토의할 시간이 있었다면 대처는 강경한 반대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방향 전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히스 꼴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대처의 경제정책의 성공은 이때 웨트 파에 대한 승리에 기인하고 있다.
그 후에도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한 바람은 거셌다. 7월의 각의에서 하우 재무장관은 웨트 파로부터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비판 받고 경기 자극 정책을 채용하도록 요청 받았다. 대처가 10월의 당 대회에서 어쩔 수 없이 정책을 전환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토니크로프트 보수당 위원장도 순 이론적 경제이론만으로 경제 회복은 바랄 수 없다고 하여 대처의 방향 전환을 강요했다.
높아지는 비판에 대해 대처는 당 대회를 앞두고 당 임원 인사와 내각의 대 개혁을 결단했다. 토니크로프트 보수당 위원장을 고령을 이유로 은퇴시키고, 후임으로 대처 파의 세실 파킨슨을 임명했다. 또 대처 경제정책 비판의 우두머리였던 길모어, 솜즈, 칼라일의 3명을 내각 외로 추방하고, 프라이어 고용장관을 북 아일랜드 장관으로 경질했다. 대신에 대처 파인 노먼 데이비드를 고용장관으로 앉히고, 매파인 통화주의자 나이젤 로슨(Nigel Lawson)을 에너지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드라이 파를 등용하여 내각 내 반란의 싹을 잘랐다.
당 대회 직전의 개각은 웨트 파에게 쇼크를 주었다. 반대 파에는 인사로 대처하겠다는 대처의 강경 노선으로, 웨트 파의 기세는 확실하게 꺾였다. 프라이어가 망설이는 것도 웨트 파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그러나 통화주의를 추진하는 대처는 굴복할 기색도 없이 통화주의 예산 편성에 부심했다. 대처 내각 성립이래 세 번째인 이 예산안은 공공지출을 43억 파운드 더 삭감하고, 공공부문 적자(PSBR)를 13조 5000억 파운드에서 10조 5000억 파운드로 내리는 초 긴축 예산이었다. 대처는 이것을 의회 제출일인 3월10일 아침에야 비로소 각의에 상정하는 아슬아슬한 일을 해치웠다. 다음 연도의 예산안을 의회 상정 일까지 각의에도 상정하지 않는다는 예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게다가 그것은 내각 내의 반대 목소리를 봉쇄하여 만든 디플레 예산이다. 반 대처 파의 각료는 경악함과 동시에 매우 화가 났다. 프라이어, 워커, 길모어의 세 각료는 즉시 격렬하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세 명만큼은 아니었으나 핌, 칼라일, 영거 등의 각료들도 우려를 표명했다. 대처를 편든 것은 겨우 화이트로뿐이었다.
대처 비판 파는 예산안을 받아들이거나 사임하는 양자택일을 강요 당했다. 이미 의회에 예산안이 제출된 이상 예산안 변경은 무리였다. 대처와 결별하고 내각을 떠나 당내 반란을 기도하거나, 아니면 예산안을 인정하여 집단 책임을 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비판 파에는 대처와 같은 신념의 사나이가 없었다. 결국 마지못해 이 예산안을 승인했다. 이후 그들은 이 미적지근한 태도에서 “웨트(wet)”라 부르게 되고, 대처 파는 “드라이(dry)”라 부르게 되었다. 웨트 파의 일부는 금후 대처가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강한 비판을 받아 자멸할 것으로 읽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예산에 의해 경제 위기는 점점 더 심각해져 머지않아 사임으로 몰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예산안을 의회 제출일의 아침에야 각의에 상정하는 대처의 기발한 책략은 말하자면 위에서의 쿠데타라 할 수 있었으나 보기 좋게 성공했다. 만일 이때 예산안을 각의에서 충분히 토의할 시간이 있었다면 대처는 강경한 반대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방향 전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히스 꼴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대처의 경제정책의 성공은 이때 웨트 파에 대한 승리에 기인하고 있다.
그 후에도 대처의 경제정책에 대한 바람은 거셌다. 7월의 각의에서 하우 재무장관은 웨트 파로부터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비판 받고 경기 자극 정책을 채용하도록 요청 받았다. 대처가 10월의 당 대회에서 어쩔 수 없이 정책을 전환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토니크로프트 보수당 위원장도 순 이론적 경제이론만으로 경제 회복은 바랄 수 없다고 하여 대처의 방향 전환을 강요했다.
높아지는 비판에 대해 대처는 당 대회를 앞두고 당 임원 인사와 내각의 대 개혁을 결단했다. 토니크로프트 보수당 위원장을 고령을 이유로 은퇴시키고, 후임으로 대처 파의 세실 파킨슨을 임명했다. 또 대처 경제정책 비판의 우두머리였던 길모어, 솜즈, 칼라일의 3명을 내각 외로 추방하고, 프라이어 고용장관을 북 아일랜드 장관으로 경질했다. 대신에 대처 파인 노먼 데이비드를 고용장관으로 앉히고, 매파인 통화주의자 나이젤 로슨(Nigel Lawson)을 에너지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드라이 파를 등용하여 내각 내 반란의 싹을 잘랐다.
당 대회 직전의 개각은 웨트 파에게 쇼크를 주었다. 반대 파에는 인사로 대처하겠다는 대처의 강경 노선으로, 웨트 파의 기세는 확실하게 꺾였다. 프라이어가 망설이는 것도 웨트 파에게는 나쁜 영향을 주었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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