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상은 분명히 영국의 영유권이 확립된 듯하나 아르헨티나는 어디까지나 인정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내에도 영유권 주장에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위기가 있었다. 식민지주의의 종결을 제창한 유엔 결의에 의거, 1965년부터 양국간에 섬의 귀속을 둘러싼 대화가 계속되어 왔다. 영국측은 영국의 주권을 인정 받는 대신에 아르헨티나를 어업 석유 개발에 참가시키는 안이나,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99년간 이 섬을 조차하는 홍콩식 조차안 등을 제안했다. 주권은 어디까지나 지키겠다는 자세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81년 6월에는 공공지출 삭감이라는 대 방침하에 남대서양에 상주하던 유일한 영국 해군함정 쇄빙 패트롤 함 ‘인듀런스(Endurance)’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영국의 태도에 1976년에 성립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기회를 탔다. 이 섬을 군사 점령해도 영국이 무력으로 탈환하지는 않을 것으로 깔본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150%라는 공포의 인플레로 노동자의 불만이 폭발하고 노조의 데모가 폭동화되고 있었다.
또 갈티에리 대통령은 겸직하던 육군사령관 지위를 1982년 말에 임기가 끝나 잃어버리게 되어 있었다. 국내 정세의 악화와 개인적 지위의 허약이라는 양쪽에서, 국민의 마음을 붙잡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정세의 악화를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기분은 해군, 공군에게도 있어 이것이 갈티에리의 개인적 야망과 합치되었다. 이런 군사 정권은 말비나스 제도(Malvinas Islas, 아르헨티나측은 포클랜드 제도를 이렇게 부름)에 대한 무력 행사를 1981년 말 결의했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략하고자 했던 것은 영국의 정보기관도 파악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국대사가 외무부로 보낸 경고 정보도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외무부나 수상 스태프나 침공이 임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 탈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대사관이 또 소란을 피운다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전 후 조사위원회가 “왜 침공을 알 수 없었는가?” 조사했을 때 침공 당시의 외무장관 캐링턴은 “그들(아르헨티나)은 (탈환을) 20년간 계속 이야기해왔다”고 변명했다.
침공의 서반전은 1982년 3월19일 아르헨티나의 철 쓰레기 회수업자가 포클랜드 동쪽 약 300km의 고도 남 조지아 섬에 상륙했을 때 시작되었다. 영국은 이것을 위법이라 항의했으나 양국간 분쟁의 씨앗으로 삼고 싶지 않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대사관에 이것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훈령을 냈다. 그러나 철 쓰레기 회수업자들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것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회복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리고 26일에는 아르헨티나 해병대가 남 조지아 섬에 상륙했다.
이때도 영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 제도에 대군(大群)으로 밀려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대처는 29일 캐링턴 외무장관과 함께 브뤼셀의 EC수뇌회의에 가는 비행기 속에서 일단 원자력 잠수함 2척의 파견을 결정했다. 30일 브뤼셀에서 귀국한 캐링턴은 그대로 이스라엘 정부와 중동 정책 협의를 위해 텔아비브로 출발했다. 영국 외무부가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현실적인 것으로 예상하지 않은 증거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영국 정부내에도 영유권 주장에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분위기가 있었다. 식민지주의의 종결을 제창한 유엔 결의에 의거, 1965년부터 양국간에 섬의 귀속을 둘러싼 대화가 계속되어 왔다. 영국측은 영국의 주권을 인정 받는 대신에 아르헨티나를 어업 석유 개발에 참가시키는 안이나,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99년간 이 섬을 조차하는 홍콩식 조차안 등을 제안했다. 주권은 어디까지나 지키겠다는 자세도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81년 6월에는 공공지출 삭감이라는 대 방침하에 남대서양에 상주하던 유일한 영국 해군함정 쇄빙 패트롤 함 ‘인듀런스(Endurance)’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영국의 태도에 1976년에 성립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기회를 탔다. 이 섬을 군사 점령해도 영국이 무력으로 탈환하지는 않을 것으로 깔본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대통령은 권력을 강화할 필요에 쫓기고 있었다. 150%라는 공포의 인플레로 노동자의 불만이 폭발하고 노조의 데모가 폭동화되고 있었다.
또 갈티에리 대통령은 겸직하던 육군사령관 지위를 1982년 말에 임기가 끝나 잃어버리게 되어 있었다. 국내 정세의 악화와 개인적 지위의 허약이라는 양쪽에서, 국민의 마음을 붙잡는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정세의 악화를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기분은 해군, 공군에게도 있어 이것이 갈티에리의 개인적 야망과 합치되었다. 이런 군사 정권은 말비나스 제도(Malvinas Islas, 아르헨티나측은 포클랜드 제도를 이렇게 부름)에 대한 무력 행사를 1981년 말 결의했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침략하고자 했던 것은 영국의 정보기관도 파악하고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영국대사가 외무부로 보낸 경고 정보도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외무부나 수상 스태프나 침공이 임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 탈환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상화되어 있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대사관이 또 소란을 피운다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전 후 조사위원회가 “왜 침공을 알 수 없었는가?” 조사했을 때 침공 당시의 외무장관 캐링턴은 “그들(아르헨티나)은 (탈환을) 20년간 계속 이야기해왔다”고 변명했다.
침공의 서반전은 1982년 3월19일 아르헨티나의 철 쓰레기 회수업자가 포클랜드 동쪽 약 300km의 고도 남 조지아 섬에 상륙했을 때 시작되었다. 영국은 이것을 위법이라 항의했으나 양국간 분쟁의 씨앗으로 삼고 싶지 않다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대사관에 이것을 시끄럽게 만들지 말라고 훈령을 냈다. 그러나 철 쓰레기 회수업자들이 아르헨티나 국기를 게양한 것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회복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리고 26일에는 아르헨티나 해병대가 남 조지아 섬에 상륙했다.
이때도 영국은 아르헨티나 군이 포클랜드 제도에 대군(大群)으로 밀려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대처는 29일 캐링턴 외무장관과 함께 브뤼셀의 EC수뇌회의에 가는 비행기 속에서 일단 원자력 잠수함 2척의 파견을 결정했다. 30일 브뤼셀에서 귀국한 캐링턴은 그대로 이스라엘 정부와 중동 정책 협의를 위해 텔아비브로 출발했다. 영국 외무부가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현실적인 것으로 예상하지 않은 증거이다.
※본란에 연재되는 내용은 구로이와(黑岩徹) 원작을 정인봉 변호사가 번역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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