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역에 내리자, 한적한 역사 안에 최근 화제를 모은 영화 ‘밀양’의 스틸 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콩나물 해장국을 시킨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창밖으로, 그 부근이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곳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였다. 책에는 ‘밀양’이라는 글씨가 흘림체로 적혀 있지만 오른쪽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원제 ‘벌레 이야기’’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논문 발표가 끝난 뒤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영화 ‘밀양’ 이야기가 나왔다. 지방 유지는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였다. 영남루가 굽어보는 강물 빛을 시작으로 이루다 손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고향 밀양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 영화는 하나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국립대학교에 재직하시는 교수님은, 영화의 완성도가 매우 높고 영화감독의 해석에 뛰어난 면이 있다고 변호하였다.
기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택시를 집어타고, 국도 1번의 고불고불한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날 내가 논문에서 다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는 정통 교학의 틀에 머물지 않고 불가와 도가까지 통섭하였으며, 걸출한 시인 최성대(崔成大)와 골동서화 감평가 김광수(金光遂) 등과 교유하여 18세기 문화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일본 여행록인 ‘해유록’과 사명당 유정의 활약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남긴 것은 새삼 그 공적을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신유한의 ‘해유록’은 한계가 없지 않지만, 일본 풍속과 정치제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뒷날 정약용은 신유한의 ‘문견록’이 산천과 풍속을 기록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본의 관방(關防, 국경 수비)과 도리(道里)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의당 관찰해야 할 것은 오직 기물(器物)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련하는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생략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정약용은 신유한이 일본 에도 지방의 기후에 대해 서술한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신유한은 이렇게 적었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쪽으로 3000여 리를 가면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에 이르고, 또 다시 동북쪽으로 1600리를 가면 강호(江戶, 에도)에 이르는데, 강호의 북쪽은 바로 야인계(野人界)에 이르게 된다. 야인과 더불어 그 남북이 동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강호는 우리나라의 육진에 해당된다. 그러나 동방은 해와 달이 뜨는 곳이라 가장 따뜻하다. 그러므로 10월에도 춥지 않아 마치 우리나라 삼남의 9월 기후와 같다.”
정약용은 “그곳 10월 추위가 우리나라 남방 9월 기후와 같다면 분명 그 땅은 우리나라 남방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에 있음이 증명되니, 어찌 서수라(西水羅, 함경북도 경흥군에 있는 우리나라 동북쪽 항구)와 서로 대치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공은 시인이다. 오직 풍월이나 읊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는 사람인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육합(六合)이 서로 얽혀 운행하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남에게 기만을 당하니, 아아!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신유한이 정약용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작가 서문에서 이청준은, “졸작 ‘벌레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동네에서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밀양 분의 말씀대로, 영화 ‘밀양’은 밀양같이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을 무대로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듯하다. 하지만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표기 한자만을 보면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밀양’이라는 지명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법도 하다.
고장 분들이 말씀하듯, 정말로 밀양의 본 모습이 영화 ‘밀양’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밀양을 위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가 콩나물 해장국을 시킨 뒤,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다. 창밖으로, 그 부근이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곳임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였다. 책에는 ‘밀양’이라는 글씨가 흘림체로 적혀 있지만 오른쪽에는 조금 작은 글씨로 ‘원제 ‘벌레 이야기’’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논문 발표가 끝난 뒤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영화 ‘밀양’ 이야기가 나왔다. 지방 유지는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였다. 영남루가 굽어보는 강물 빛을 시작으로 이루다 손꼽을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고향 밀양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 영화는 하나도 제대로 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산의 국립대학교에 재직하시는 교수님은, 영화의 완성도가 매우 높고 영화감독의 해석에 뛰어난 면이 있다고 변호하였다.
기차 시간에 맞춰 서둘러 택시를 집어타고, 국도 1번의 고불고불한 도심을 빠져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이날 내가 논문에서 다룬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란 인물에 대한 평가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는 정통 교학의 틀에 머물지 않고 불가와 도가까지 통섭하였으며, 걸출한 시인 최성대(崔成大)와 골동서화 감평가 김광수(金光遂) 등과 교유하여 18세기 문화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일본 여행록인 ‘해유록’과 사명당 유정의 활약을 기록한 ‘송운대사분충서난록’을 남긴 것은 새삼 그 공적을 재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신유한의 ‘해유록’은 한계가 없지 않지만, 일본 풍속과 정치제도에 대해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였다.
뒷날 정약용은 신유한의 ‘문견록’이 산천과 풍속을 기록한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일본의 관방(關防, 국경 수비)과 도리(道里)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점을 지적하고, “의당 관찰해야 할 것은 오직 기물(器物)의 정교함과 여러 가지 조련하는 법인데, 이 책에서는 그 점이 생략되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더구나 정약용은 신유한이 일본 에도 지방의 기후에 대해 서술한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신유한은 이렇게 적었다. “대마도로부터 동북쪽으로 3000여 리를 가면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에 이르고, 또 다시 동북쪽으로 1600리를 가면 강호(江戶, 에도)에 이르는데, 강호의 북쪽은 바로 야인계(野人界)에 이르게 된다. 야인과 더불어 그 남북이 동대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강호는 우리나라의 육진에 해당된다. 그러나 동방은 해와 달이 뜨는 곳이라 가장 따뜻하다. 그러므로 10월에도 춥지 않아 마치 우리나라 삼남의 9월 기후와 같다.”
정약용은 “그곳 10월 추위가 우리나라 남방 9월 기후와 같다면 분명 그 땅은 우리나라 남방에서 남쪽으로 1000여 리에 있음이 증명되니, 어찌 서수라(西水羅, 함경북도 경흥군에 있는 우리나라 동북쪽 항구)와 서로 대치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공은 시인이다. 오직 풍월이나 읊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는 사람인데,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육합(六合)이 서로 얽혀 운행하는 이치는 전혀 모르고 남에게 기만을 당하니, 아아! 참으로 통탄스러울 뿐이다”라고 덧붙였다.
신유한이 정약용의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작가 서문에서 이청준은, “졸작 ‘벌레 이야기’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쓴 소설이다. 작품을 쓰기 얼마 전 서울의 한 동네에서 어린이 유괴살해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밀양 분의 말씀대로, 영화 ‘밀양’은 밀양같이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을 무대로 하지 않았더라도 좋았을 듯하다. 하지만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 신의 계시를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표기 한자만을 보면 빛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밀양’이라는 지명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법도 하다.
고장 분들이 말씀하듯, 정말로 밀양의 본 모습이 영화 ‘밀양’에서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밀양을 위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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