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9)

    기고 / 시민일보 / 2007-07-10 20: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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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봉譯(변호사)
    사망자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그녀는 괴로운 표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족들에게 뭘 해줘야 할까? 아아, 유족들이 괜찮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들은 괜찮을까?”

    이때 대처를 지탱한 것은 부수상 격인 화이트로였다. 제2차 대전 중 군인이었던 그는 지휘관이 동요를 보이면 전선이 혼란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대처에게 결코 약한 티를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장군들에게 리더를 존경하게 하고 그 지시를 존중하게 하려면 어떤 동요의 기색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화이트로는 대처에게 깨우쳐주었다. 화이트로는 군인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높은 신분에는 의무가 수반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 포클랜드 분쟁 중 수에즈의 전철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에 쫓기고 있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그러나 그 불안을 일체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대처를 계속 격려했다.

    기동함대의 파견이 결정된 후 영국의 전시 내각이 발족했다. 대처, 화이트로, 핌, 노트, 파킨슨의 5명이 상주 멤버며, 여기에 르윈 참조총장이 종종 참가했다. 그런 만큼 화이트로의 대처에 대한 충고는 무게가 있었다.

    헤이그 조정 실패 후 페루의 벨라운데(JoseAntonio Garcia Belaunde) 대통령의 화평 공작도 케야르(Javier Perez de Cuellar) 유엔 사무총장의 중개 공작도 열매를 맺지 못해, 외교 교섭이 모두 실패한 후 영국군의 포클랜드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포클랜드 동쪽 섬의 서안 샌 카를로스(San Carlos)이다.

    상륙이 거의 끝난 직후 아르헨티나 항공대의 파상 공격이 영국 함대를 습격했다. 미국 제 스카이호크, 프랑스 제 미라주(Mirage), 아르헨티나 독자적인 전투기 푸카라(Pucara)가 1일 연 72기나 날아와서 함선이나 상륙 부대에 폭격을 가했다.

    프리깃 함 “아덴트(Ardent)”는 침몰하고 “아르고 호(Argonaut)”는 대파되었다. 그 후 4일 동안에 보급 선 “”코번트리(Coventry)”와 “아틀랜틱 컨베이어(Atlantic Conveyor)”가 침몰했다. “아틀랜틱 컨베이어”에는 한번에 대원 80명을 운반할 수 있는 거대한 치누크(Chinook) 헬리콥터 3대, 웨섹스(Wessex) 헬리콥터 6대, 텐트 4천 명 분 등이 적재되어 있었으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영국군은 보급물자를 단번에 잃었다. 그날까지 침몰 또는 피격된 영국 함은 12척이 넘었다. 아르헨티나 기의 격추도 30대를 넘어섰다.

    샌 카를로스에 상륙한 영국군은 수도 포트스탠리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으나, 도중에 구스그린에서 아르헨티나 군의 맹렬한 반격을 만났다. 작전의 지휘를 맡은 패러슈트 연대 제2 대대장 허버트 존즈 육군 중령은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아르헨티나 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빼다 박은 듯한 감투정신이었다. 영국군 장교 중에는 부하를 이끌고 먼저 선두에 선다는 이런 지도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흐르고 있다. 제2차 대전 중 장교 전사 율이 가장 높았던 것이 영국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처는 7개월 후 포클랜드 섬을 방문했을 때 이 섬에 매장된 고 존즈 중령의 묘에 참배했다. 그녀도 지도자로서 중령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영국군이 수도 포트스탠리의 포위를 끝냈을 무렵, 교섭 해결에 대한 압력이 국내외에서 높아지고 있었다. 법왕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고, 레이건 대통령은 베르사이유 선진국 수뇌 회의(경제 서미트)에 참석한 후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영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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