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 계획을 세웠다가 이제야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한말 지사들의 항일운동의 거점지역인 중국의 밀산, 즉 봉밀산(蜂蜜山)에 다녀왔다. 극소수의 전문연구가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밀산지역은 낯선 곳이다. 오늘의 우리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는 것 같다.
어지러운 국내정세를 뒤로 하고 중국의 연길과 흑룡강성의 밀산지역을 다녀왔다. 지난해 시작한 중국조선족 청소년 가족상봉사업을 점검하고, 올해부터 확대하기로 한 흑룡강 지역의 인사들을 만나 학생선발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서 흑룡강성의 남부중심지역인 목단강에서 동북방향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에 있는 밀산지역을 방문해 초청학생 선발도 확인하고 1910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됐던 독립운동의 근거지 건설유적지도 답사하였다. 이번 밀산기행에는 연변 방송의 이정준 선생이 함께 했다.
우려했던 대로 연변자치주는 말할 것도 없고, 흑룡강성 지역의 조선족 해체현상이 심각했다. 기름진 땅에서 벼와 감자, 옥수수 농사를 주로 지었던 조선족들이 모여살던 마을은 한중수교 이후 한국기업들이 위해, 청도 등의 발해만 일대와 심천, 상해, 광주 등지에 공장을 짓자 취업을 위해 중국각지로 흩어졌고, 또 수십만명이 한국으로 나가면서 동북3성에는 조선족 마을이 아예 없어지거나 노인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밀산현에도 그런 현상은 마찬가지였지만, 낙후한 농촌지역에 속하기 때문인지 조선족의 초, 중, 고등학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밀산지역 방문은 연길지역이나 한국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연고로 그 먼 밀산까지 가려 하느냐는 거였다. 연길에서도 천리길이고, 교통이나 숙박시설도 불편할 것이라는 염려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런 걱정은 사치였다. 중국동북지역의 밀산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고, 지사들의 꿈과 피땀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왜 오지 가운데 오지였던 밀산에 항일애국지사들은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연길에서 새벽 3시에 기차를 타고 목단강시를 거쳐 털털거리는 소형버스를 타고 오후 4시를 넘어서 밀산시에 와서야 항일지사들의 꿈이 비로소 실감났다. 한말의 지사들에게 이곳은 봉밀산(蜂蜜山)으로 알려졌다. 꽃과 나무가 울창한 산에 벌들이 많아서 꿀이 넘쳐나는 산이라는 봉밀산(蜂蜜山)이 바다 같은 흥개호가에 있었던 것이다. 흥개호는 /14이 중국, 3/4이 러시아지역으로 현재 국경선이 걸쳐있다. 이런 봉밀산 일대가 독립전쟁 근거지 건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천리길가에는 끊임없이 벼와 옥수수, 감자밭이 대평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땅은 지금도 기름졌고, 수량도 풍부해서 가뭄걱정이 별로 없었다. 청나라가 여진족의 발상지인 이곳을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지역으로 오랫동안 묶어놔서 버려진 땅들을 개간하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쉬웠다. 그 청나라는 망해가고 마적떼가 날뛰는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1907년에 봉기했던 의병부대가 일제의 토벌작전에 쫓겨 간도지역으로 모여들었고, 두만강 건너 함경도 지역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의 농민들이 남부여대해 넘어왔던 것이다. 생존해야 싸울 수 있었는데 밀산은 그 조건에 적합했다.
둘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사실상 일제지배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한말의 지사들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치루면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근거지 건설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 1차 대상지가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의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이었다.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대립관계에 있던 러시아의 연해주지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지역은 일제의 직접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고, 중국 중앙정부의 힘도 미약해서 가장 호조건이었다. 일정한 국제 외교적인 안전지대로 인식됐던 것이다.
셋째는 군사적인 이유였다. 1904년에 용산에 일제가 조선군주차사령부를 세우고 전국에 경찰과 헌병대 조직을 만들어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건설하자, 국내에서 무장항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도 피하고 역량을 키워 국내에 진공할 수 있는 군사거점이 필요했고, 두만강 건너의 간도지역은 이 조건에 맞았다. 그 중에서도 밀산지역은 러시아의 연해주와 맞닿아 있어서 만일의 경우 안전지대로 도피할 수 있었다. 이 동북지역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일본이 차기 점령지로 노리고 있었고, 미국 또한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이후 만주에 욕심을 내던 지역이었지만, 1910년 전후한 상황은 정치, 군사적으로 공백지대였다.
이 봉밀산 일대야말로 한말지사들에게 새로운 신천지였고, 절망스런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전쟁의 근거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항일세력들은 봉밀산 지역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현장답사를 하기 시작했고, 1907년 1월에 국내에 들어온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를 조직해 독립전쟁준비에 들어가면서 이강 등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봉밀산 일대에 근거지 건설계획을 구체화한다. 이상설 등 근왕파들도 이승희를 보내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한편 1905~1907년 의병전쟁 이후 1908년까지 간도지역으로 옮겨왔던 홍범도부대를 비롯한 의병부대들도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어지러운 국내정세를 뒤로 하고 중국의 연길과 흑룡강성의 밀산지역을 다녀왔다. 지난해 시작한 중국조선족 청소년 가족상봉사업을 점검하고, 올해부터 확대하기로 한 흑룡강 지역의 인사들을 만나 학생선발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서 흑룡강성의 남부중심지역인 목단강에서 동북방향으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에 있는 밀산지역을 방문해 초청학생 선발도 확인하고 1910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됐던 독립운동의 근거지 건설유적지도 답사하였다. 이번 밀산기행에는 연변 방송의 이정준 선생이 함께 했다.
우려했던 대로 연변자치주는 말할 것도 없고, 흑룡강성 지역의 조선족 해체현상이 심각했다. 기름진 땅에서 벼와 감자, 옥수수 농사를 주로 지었던 조선족들이 모여살던 마을은 한중수교 이후 한국기업들이 위해, 청도 등의 발해만 일대와 심천, 상해, 광주 등지에 공장을 짓자 취업을 위해 중국각지로 흩어졌고, 또 수십만명이 한국으로 나가면서 동북3성에는 조선족 마을이 아예 없어지거나 노인들만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밀산현에도 그런 현상은 마찬가지였지만, 낙후한 농촌지역에 속하기 때문인지 조선족의 초, 중, 고등학교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번 밀산지역 방문은 연길지역이나 한국에서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연고로 그 먼 밀산까지 가려 하느냐는 거였다. 연길에서도 천리길이고, 교통이나 숙박시설도 불편할 것이라는 염려때문이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런 걱정은 사치였다. 중국동북지역의 밀산은 한말과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고, 지사들의 꿈과 피땀이 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왜 오지 가운데 오지였던 밀산에 항일애국지사들은 그토록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연길에서 새벽 3시에 기차를 타고 목단강시를 거쳐 털털거리는 소형버스를 타고 오후 4시를 넘어서 밀산시에 와서야 항일지사들의 꿈이 비로소 실감났다. 한말의 지사들에게 이곳은 봉밀산(蜂蜜山)으로 알려졌다. 꽃과 나무가 울창한 산에 벌들이 많아서 꿀이 넘쳐나는 산이라는 봉밀산(蜂蜜山)이 바다 같은 흥개호가에 있었던 것이다. 흥개호는 /14이 중국, 3/4이 러시아지역으로 현재 국경선이 걸쳐있다. 이런 봉밀산 일대가 독립전쟁 근거지 건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 천리길가에는 끊임없이 벼와 옥수수, 감자밭이 대평원처럼 펼쳐져 있었다. 땅은 지금도 기름졌고, 수량도 풍부해서 가뭄걱정이 별로 없었다. 청나라가 여진족의 발상지인 이곳을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지역으로 오랫동안 묶어놔서 버려진 땅들을 개간하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쉬웠다. 그 청나라는 망해가고 마적떼가 날뛰는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에 1907년에 봉기했던 의병부대가 일제의 토벌작전에 쫓겨 간도지역으로 모여들었고, 두만강 건너 함경도 지역에서 살기가 어려워진 조선의 농민들이 남부여대해 넘어왔던 것이다. 생존해야 싸울 수 있었는데 밀산은 그 조건에 적합했다.
둘째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돼 사실상 일제지배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자 한말의 지사들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을 치루면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근거지 건설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그 1차 대상지가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의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이었다. 1904년의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대립관계에 있던 러시아의 연해주지역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지역은 일제의 직접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고, 중국 중앙정부의 힘도 미약해서 가장 호조건이었다. 일정한 국제 외교적인 안전지대로 인식됐던 것이다.
셋째는 군사적인 이유였다. 1904년에 용산에 일제가 조선군주차사령부를 세우고 전국에 경찰과 헌병대 조직을 만들어 거미줄 같은 감시망을 건설하자, 국내에서 무장항쟁을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도 피하고 역량을 키워 국내에 진공할 수 있는 군사거점이 필요했고, 두만강 건너의 간도지역은 이 조건에 맞았다. 그 중에서도 밀산지역은 러시아의 연해주와 맞닿아 있어서 만일의 경우 안전지대로 도피할 수 있었다. 이 동북지역은 러일전쟁 이후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 일본이 차기 점령지로 노리고 있었고, 미국 또한 필리핀을 식민지화한 이후 만주에 욕심을 내던 지역이었지만, 1910년 전후한 상황은 정치, 군사적으로 공백지대였다.
이 봉밀산 일대야말로 한말지사들에게 새로운 신천지였고, 절망스런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독립전쟁의 근거지로 떠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내외의 항일세력들은 봉밀산 지역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현장답사를 하기 시작했고, 1907년 1월에 국내에 들어온 안창호 선생은 신민회를 조직해 독립전쟁준비에 들어가면서 이강 등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봉밀산 일대에 근거지 건설계획을 구체화한다. 이상설 등 근왕파들도 이승희를 보내 토지매입을 시작했다. 한편 1905~1907년 의병전쟁 이후 1908년까지 간도지역으로 옮겨왔던 홍범도부대를 비롯한 의병부대들도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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