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장 전입’의 정치. 사회학

    기고 / 김유진 / 2009-09-21 15: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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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천 전 국회의원
    동물의 세계에서 ‘위장’은 생존이다.

    쫓는 자건 쫓기는 자건 매한가지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위장’은 특별한 생존의 조건이다.

    장관 자리가 거의 모든 정치인의 로망으로 자리한, 정승 자리가 특별한 성공으로 인식되는 입신양명의 사회에서 ‘위장’은 성공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우리나라 청문회의 가장 기본적 검증사항은 능력이 아니다. 정책 능력이 아니다.

    주소지 이전의 문제다. 이른바 ‘위장 전입’이다.

    위장 전입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호의적으로 표현하여 내집마련이다.

    중립적으로 표현하자면 투자다.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부동산 투기다.

    좁은 땅, 많은 인구, 집중된 서울에서, 그것도 자산가치 있고 환금성 있는 곳에 투자처를 찾기 위해선 위장 전입은 필수요소가 되고 말았다.

    둘째는 교육목적이다.

    이른바 강남학군에 명문학교가 몰려있다보니 어떻게든 그곳으로 자기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을 불사한다.

    교육문제다.

    교육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을 통해 꿈을 실현하고 입신양명의 현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런 의미의 위장 전입 또한 필수다.

    호의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교육이고, 중립적으로 표현하면 내 자식 사랑이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교육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치명적 왜곡이다.

    결국 이렇게 보면 위장 전입의 근원에는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왜곡이자 현안인 교육과 부동산 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는 위장 전입의 문제를 해소할 수 없을 것 같다.

    교육에 대한 공공성과 부동산에 대한 공개념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근본이 되어야 한다.

    공교육을 살려야 하는 것이고, 공정한 기회를 보장해야하며, 부동산이 소유나 투기의 목적이 아니라 이용과 주거의 목적이 될 수 있도록, 절대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 문제는 끊임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근본문제이다.

    물론 중간 차원의 비난과 문제제기는 충분히 있을 수 있고, 그런 비난에서 공직자들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첫째, 보통 시민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명예와 사회적 기회를 가지고 있는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왜 이토록 탐욕스러운 위장 전입을 불사해야만 했을까. 공직에 대한 기초 개념의 문제이다.

    공직을 성공의 수단, 입신양명의 수단, 정승이 되는 길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봉사에 대한 개념보다는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공직에 대한 준비가 돼있지 않았고, 공직에 대한 기초개념 자체가 철저히 왜곡돼 있다는 증거다.

    제대로 된 사회과목의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이중 잣대의 문제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으로 사회적 도덕과 인사검증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가기 보다는 정략적 발상으로 끊임없이 정치적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단이 바로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한다.

    청문회가 제대로 시작된 건 김대중 행정부 시절이다.

    그리고 노무현 행정부는 이 폭을 훨씬 넓혀 놓았다.

    이 때 공격을 담당하고 기준을 세웠던 이들이 바로 현재 피고인의 석에 서서 검증을 당해내고 있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이중성과 정치적 편향성이야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다.

    셋째, 법과 도덕에 대한 구별 혹은 기준 자체가 우리 사회의 취약점이다.

    법이라는 그물은 멸치는 잡아들이되 고래는 잡아들이기 어렵다.

    멸치는 저인망으로 끌어낼 수 있지만, 고래는 그물 자체를 끌고 달아나 버린다.

    큰 고기는 잡을 수 없는 그물이다.

    여기에다 성공지상주의와 조급증이 지배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양심과 도덕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위험 요인은 끊임없이 우리 사회사를 뒤흔들어 왔다.

    제대로 된 역사, 혼과 정신이 살아있는 사회사에 대한 신뢰부족이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다.

    진정한 법치와 진정한 종교적 도덕관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교육과 법치행정과 종교의 역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넷째, 장관 자리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만큼은 은혜적이요, 시혜적이다.

    누구나 장관을 꿈꾸며 선거 캠페인에 뛰어든다.

    대통령 임기 내내 총리건 장관이건 같이 가기는 어렵다.

    장관에 대한 수요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매년 장관을 바꿀 수밖에 없고, 인사청문회를 계속할 수밖에 없다.

    어느새 만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관인사가 한마디로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거기서 거기고,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우리 사회 리더그룹의 도덕성과 인생 자체가 거의 유사하고 이런 인재 풀 속에서 위장 전입 경력 없는 장관 후보를 찾아내기가 결코 쉽지 않을지 모른다.

    백 명 중에 한 명을 찾는 일이라면 괜찮겠지만, 백 명 중에서 7~80명 정도를 장관 후보로 청문회장에 올려야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투명하고 청렴하고 정책능력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기가 어려운 형편이 돼버릴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제 와서 남탓하며 사회적 기준을 만들자는 것도 우습다.

    도덕성 용인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만들자는 것도 우습다.

    사회적 기준은 끊임없이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위법과 도덕에 대한 사회적 기준조차도 역시나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 원·피고도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입신양명에 대한 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도 우리 사회에서 만큼은 끊임없이 강화될 것이다.

    그래서 교육의 공공성과 부동산의 공개념이 위장 전입의 근본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더 근본문제는 결국 법과 도덕의 문제요, 품성의 문제요, 공직관의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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