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관위는 ‘권력기관’이 아니다

    기고 / 김유진 / 2010-05-03 1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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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재천 전 국회의원
    (최재천 전 국회의원)

    선관위는 권력기관인가. 5권분립의 하나인가.

    우리나라만의 특별한 행사로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선거관리위원장이 함께 모여 국정에 대해 논하는 ‘5부 요인’들의 모임이 종종 있습니다. 정말 5부일까요. 우리나라는 3권분립을 넘어 헌법재판소를 포함하는 4권분립이고, 선거관리도 일종의 권력분립이 되는 5권분립의 나라일까요. 그래서 5권 기관의 장들은 5부 요인이 되는 거고, 이분들의 모임은 5부 요인들의 모임이 되는 건가요.

    헌법 제3장의 제목은 ‘국회’입니다. 제4장은 ‘정부’입니다. 제5장은 ‘법원’입니다. 제6장은 ‘헌법재판소’입니다. 이에 반해 제7장의 제목은 ‘선거관리’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아닙니다. 제8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방자치’입니다. ‘지방자치정부’가 아닙니다.

    왜 우리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제7장의 제목을 ‘선거관리위원회’가 아니라 ‘선거관리’라고 했을까요.

    선거관리는 고작 조문도 3개 뿐입니다. 제114조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조직과 근거규정이고, 제115조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 관련 지시를 내릴 수 있는 근거규정이고, 제116조는 선거운동과 선거경비에 대한 조항입니다. 지극히 단순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헌법개정에 나선 사람들은 선거관리를 어떤 권력이나 집행권이나 기관으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치고 선거관리를 담당하는 국가기관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선거관리는 집행권능입니다. 그렇다면 집행부인 행정부로 들어가야 할까요. 그래서는 안되겠지요. 가능하면 집행부로부터 독립된 특별기관으로 구성하는 것이 더 헌법적이겠지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필리핀이나 인도, 엘살바도르처럼 아예 헌법에 규정을 해버렸습니다. 사실상 헌법기관의 형식으로 규정해버린 것이지요. 이때 규정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연히 험난했던 우리 헌정사가 고려됐었겠지요. 선거의 독립과 중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뼈저리게 느껴온 공화국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그랬겠지요.

    선거관리는, 이승만 정권 말기 3.15 부정선거를 거치고 난 다음 4.19를 겪고,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정헌법 때 처음으로 헌법에 들여옵니다. 제헌헌법 때만 하더라도 선거관리를 행정부의 권한으로 두었지요.

    방점은 선거관리에 있었겠지요. 공정한 선거관리, 중립적인 선거관리, 기회의 균등, 선거의 공영화, 선거운동의 자유, 이런 기본 개념 하에서 헌법기관으로 규정은 하되, ‘기관성’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그 기능과 선거의 ‘공영성’이라는 제도에 중점을 두어 굳이 ‘선거관리’라는 장의 제목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헌법이야말로 문리해석과 역사적 해석이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예나 지금이나 이 부분에 대해서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이 선거관리에 대해 3개의 조문을 둔 것은 ‘선거관리위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거 관리를 위한 것이다’라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외로워야 합니다. 차라리 좀 더 독립적이어야 합니다. 고립을 즐겨야 합니다. 5부 요인 모임에 나서기보다 차라리 정당과 정치로부터 좀 더 거리를 두는 것이 타당합니다. 주권자의 입장에 맞게 선거운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정치적 참정권을 강력하게 보장하는 쪽으로 기능과 제도를 운용해야 합니다.

    역설적이지만 정치로부터 가장 독립되고 가장 자유스러워야 할 조직이 선거관리위원회입니다. 가까이가면 갈수록 위험해지는 조직입니다.

    정치적 자유를, 선거운동의 자유를, 가장 넓게 보장할 때만이 비로소 선거관리위원회의 자유는 극대화되고 선거관리의 역할은 무한정 확대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관위는 나서기 보다는 뒷줄에 서기를 사랑해야 하고, 하지말라고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이렇게 하면 좋겠다며 선도해야 합니다. 무엇이든 ‘안돼’라기보다는 ‘이것만은 꼭 지켜주고 나머지 모든 것은 해도 좋다’라는 식으로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공론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합니다. 모든 권력기관은 선거를 통해서 구성됩니다. 선거란 민주주의의 핵심이지요. 그 핵심적 권능을 담당하고 관리하는 기구가 선관위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관위는 너무 정치적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는 걸 즐겨하고 있습니다. 관리 기능을 넘어서, 집행권능을 지나치게 편애합니다. 위험합니다.

    구체적인 정책에다 선거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위험합니다. 국민의 표현의 자유, 정보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시위의 자유, 정책에 대한 평가의 자유, 정보에 대한 접근의 자유를 규제하려 듭니다. 기존의 소통 방식에 익숙한 나머지 새로운 유형의 소통방식과 시대상을 부정하려 듭니다. 트위터에 대한 규제가 하나의 예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선관위 스스로 소극적이고 공정한 독립적 관리기관에서 명령기관, 집행기관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려 합니다. 완장기관이 되려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선관위 결정에 대한 불복종 운동이 일어납니다. 행정부조차도 명령에 불복하려는 태세입니다. 국토해양부는 4대강 관련 정부의 홍보 부스를 폐쇄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편 시민단체는 4대강 사업이나 무상급식 집회에 서명 금지 등이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입장들입니다.

    정치에 너무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위험합니다. 선관위가 위험합니다. 선관위가 위험해지면 선거의 공정성이 의심받게 되고 이 땅의 민주주의가 힘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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