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사색 즐기기엔 이곳이 딱!

    기획/시리즈 / 이나래 / 2012-11-22 15: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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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걷고 싶은 길 '서울 종로구 부암동'
    [시민일보]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겨울이다.
    대로변에 질펀히 으깨진 은행의 고약한 내가 가시기도 전에 수굿한 겨울 냄새가 풍겨온다.
    길거리에서 노릇노릇 익는 붕어빵 냄새, 달고 푸짐한 계란빵 냄새, 짭조름한 어묵 국물 냄새……. 길가에 퍼진 냄새들이 겨울을 일깨운다.

    겨울이 오면 만물은 제 가진 것을 떨군다. 나무는 잎을, 동물은 푸석해진 살비듬을 떨군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일년 동안 헝클어놓은 생각을 다듬고 반성한다. 겨울은 으레 반성을 하는, 혹은 반성을 해야 할 것 같은 계절이다.

    반성에 앞서 필요한 건 침묵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세상의 외물(外物)에서 한 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였을 때 들리는 목소리다. 자기에게 집중했을 때 비로소 자기 본연의 에너지가 응축된다.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혼자 걷기 좋은 길이 서울에는 어디에 있을까.

    기자는 내로라하는 서울의 ‘걷기 좋은 길’을 부지런히 찾아다녀 봤지만 그중에 제일은 종로구 부암동이었다. 걷기 좋은 길의 3가지 요건은
    1)유동인구가 지나치게 많거나 적지 않고
    2)길의 포장 상태가 고르며
    3)길 안내가 잘 돼 있는 곳이다.
    부암동, 그 중에서도 서울미술관을 기점으로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을 향하는 길은 이 3박자를 넘침도 부족함도 없이 갖췄다.

    인근 삼청동이 주말마다 데이트족들로 붐벼 멀리서보면 마치 지하철 무빙워크(moving walk)처럼 보이는 데 비해, 인사동이 내외국인 관광객이 섞여 혼잡스러운 데 비해, 부암동은 저 혼자 고즈넉하고 아늑해 자못 숙연해지기까지 하는 동네다.
    그래서일까. 옛날 흥선 대원군은 현 부암동에 별장(석파정)을 두고 즐겨 찾았고, 추사 김정희는 부암동 백사실계곡에 별장(백석동천)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겼다. 부암동은 오래전부터 손꼽히는 풍류터였던 것이다.
    ◆ 부암동, 서울의 안방 같은 곳…서울미술관

    광화문에서 7212번 버스를 타고 경복궁을 지나면 서울 같지 않게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로 들어선다.
    버스로 불과 5분 전에 지나온 광화문과 종로 일대가 시민 누구나 놀 수 있게 펼쳐진 마당이라면 부암동은 안방 같이 고요하고 편안한 동네다. 길은 좁고 아늑하다.
    버스가 언덕을 따라 자하터널을 지나면서 이 같은 평온함은 더욱 고조된다. 남들이 찾지 않는 은밀한 정원에 몰래 숨어드는 느낌이다.

    창의문 인근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여기서부터 부암동 걷기가 시작된다.
    길을 따라 안으로 조금 더 깊이 걸어들어가면 왼편에 부챗자락 같은 북악산이 펼쳐지고 전방 100여m에 ‘서울미술관’ 간판이 보인다.
    올 여름 개관한 이곳은 현재 한국작가 천경자, 김창열(물방울작가) 등의 상설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회명은 ‘서울미술관 개관기념상설전 Deep & Wide’이다.

    상설전은 천경자, 전광영, 이대원, 유영국, 백남준, 변종하, 박생광, 남관, 김창열의 작품을 몇점씩 만나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선 이중섭의 작품을 모아놓은 ‘둥섭, 르네상스로 가세!’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서울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미술관 전시를 둘러보고 3층으로 이어진 문을 빠져나가면 흥선 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이 반긴다.

    ◆ 골목 따라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으로

    서울미술관 구경을 마치고 다시 정류장 쪽으로 15분간 올라오면 왼편으로 북악산 가는 길이 이어진다.
    북악산은 차로 가거나 걸어서 가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 길은 차 없이 걸어가는 이들을 위한 코스다. 입구에 파스타 식당과 카페가 5군데 쯤 모여 있는 곳을 지나 안으로 쭉 따라 들어가면 금방 주택가가 나온다.
    이곳을 따라 20분 쯤 걸어올라가면 드라마 커피프린스에 나와 유명해진 카페 산모퉁이가 나온다. 여기까지 오면 3분의1 가량 올라온 셈이다. 주택가여서 조용하지만 그렇다고 외진 것도 아니다. 북악산스카이웨이가 워낙 알려진 곳이다 보니 올라가고 내려오는 무리들과 간간이 마주치게 된다.

    까페 산모퉁이에서부터 본격적인 등산길 시작이다. 여기를 지나면서부터 주택가가 등산길로 바뀐다. 내려다보니 서울 시가지가 아득하고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산 아랫동네에 불이 점점이 켜지고 노을이 아련하게 내다보인다.

    이곳에서부터는 찻길이 섞이면서 차가 지나다니지만 이 때문에 외지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다. 어둑한 밤 산행의 적적함을 옆의 차들이 달래준다. 차들이 줄지어 가는 것이 아니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것이어서 시끄럽지도 않다.

    25분 정도 가다보면 산 정상이다. 눈앞에 팔각정이 보인다. 명소 치고는 작은 규모다. 날씨가 쌀쌀해서인지 방문객들이 생각보다 적다.

    ◆ 어둠 속에서 바라본 서울의 남북

    팔각정 따라 원 형태로 한바퀴 돌다보면 서울의 남북을 모두 볼 수 있다.
    남쪽은 그야말로 기라성 같이 불빛이 빼곡하다. 휘황찬란하다는 표현으론 부족하다. 점점이 들어찬 불빛에 눈이 시릴 지경이다. 그러나 반 바퀴를 돌아 북쪽을 바라보면 캄캄하기 그지 없어 영락없는 산골 같다.
    오래전 산을 헐고 들어선 집들에서 교교한 불빛이 드문드문, 말없이 새어나온다. 서울 남북지역 발전도의 차이가 아직도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이곳이야말로 가을의 끝 그리고 겨울의 문턱에서 서울의 남북을 돌아보며, 자기 자신의 지난 일 년을 돌아볼 수 있는 장소다.

    이나래 기자 wng1225@siminilbo.co.kr
    사진 설명 = 서울 종로구 부암동은 인근 도심과 달리 운치있고 조용해 혼자 걷기에 좋은 동네다. 사진은 지난 여름 개관한 부암동 서울미술관 전경이며,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흥선대원군의 별장으로 쓰인 석파정(서울시 유형문화재 26호인 석파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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