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산호의 서평칼럼] 라면이 없었더라면

    기고 / 박산호 / 2013-12-30 14: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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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산호(출판 번역가)


    ‘세상에는 늘 하고 나서 후회하는 일이 존재한다’고 과학 칼럼니스트 이은희가 말했다. 그런 일이야 손가락도 모자라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부족할 정도로 많겠지만 예를 들어보면 이런 거 아닐까. 이제 몇 개 안 남았다는 쇼핑 호스트의 긴박감 넘치는 목소리에 홀려 저도 모르게 신용카드 번호를 꾹꾹 눌러버렸을 때, 변심한 애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되겠냐고 애원했을 때, 취한 김에 호기롭게 술값 다 내고 다음 날 아침 핸드폰에 찍힌 금액에 식겁했을 때 등등. 이와 동급이지만 살아가는 한 계속 반복될 후회 중 하나는 바로 한밤중에 라면 끓여먹고 다음 날 거울 속에 뜬 달덩이를 영접하는 것.


    그렇다. 오늘은 소설가 정이현, 박성원, 이기호, 박상과 예술학 교수 박영택, 중국학 교수 양세욱, 저술가 표정훈, 과학 칼럼니스트 이은희가 라면을 주제로 쓴 글 모음집인 <라면이 없었더라면>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읽었을 때는 마침 정이현이 표현한 ‘라면에 썩 잘 어울리는 시간대인’ 밤 10시를 넘겨 새벽 1시 반으로 달려가는 시간대였다. 그래서 허기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있을 때 라면이라는 제목과 함께 간단한 책 소개를 읽는 순간 결심이 섰다. 거기다 감자, 후추, 커피, 소금과 같이 우리의 식탁을 호령하는 근본적 먹거리의 역사와 유래에 대한 책이라면 무조건 지르고 보는 나로서 이 책은 이른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었다.


    자, 젓가락에 찍힌 저자들의 이름이 보이는 표지를 넘기면 제일 먼저 정이현의 글이 나온다. ‘돌이켜보면 삶의 어떤 고비마다 한 그릇의 라면이 있었는데’라는 그녀의 말처럼 한국 사람치고 그 한 그릇의 추억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도 그런 추억을 담담하게 풀어 놓는다. 소설가인 박성원은 자취방에서 곰팡이가 피어나듯 슬금슬금 모여든 친구들과 함께 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다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한다.


    그런가 하면 소도시 말단 공무원 아들로 태어나 그에 맞게 입맛도 말단으로 평범하다는 소설가 이기호는 취업도 하지 않고 자취방 책상에 앉아 소설을 끼적거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라면 덕분이었다고 술회한다. 책 읽고, 라면 끓이고, 소설 쓰고 라면 끓이는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 그라는 소설가를 만들었다는 회고담. 인터넷 서점에 나온 프로필 하나로 사람을 웃게 만드는 능력자 박상은 지독한 라면 마니아로서 좋아하는 라면을 팔면서 손님이 없을 땐 가게 한구석에 앉아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 없어 그 꿈을 접고 글을 쓰다 한 종류의 라면만 먹는 삶이 지겨워져 온갖 버라이어티한 라면 끓이기를 시도하면서 그와 함께 다양한 문학적 형식을 실험해보는 세월을 꽤 오래 보낸다. 그러다 종국에는 라면 본연의 맛으로 회귀하면서 얻은 깨달음으로 그 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야기를 라면 맛처럼 맵고도 자극적으로 들려줬다.


    한 가지 맛의 라면 이야기만 읽다가 슬슬 지겨워질 무렵 중국학 교수 양세육의 라면에 대한 박물학적인 지식이 나와 입맛을 바꿔준다. 그의 글을 통해 만화에나 나올 법한 ‘세계라면협회’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고, 중국에서 유래돼, 일본에서 히트 치고,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묘한 라면 삼국지’의 유구한 역사를 배웠다. 삼양라면을 만든 전중윤이 대한민국 음식계의 문익점 같은 인물이라는 것도 박영택의 글에서 처음 알았다. 이렇게 감성적이고 말랑말랑한 라면 스토리를 거쳐, 라면의 문화 역사적 사실을 배우고 나면, 표정훈이 쓴 대중문화 속 라면의 풍경들이 등장한다.


    그의 글에서도 나왔지만 라면 하면 또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은근하게 도발적인 대사 ‘라면 먹고 갈래요?’를 빼놓을 수 없겠다. <처음 봄날은 간다>를 봤을 때는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애처롭게 물어보던 유지태의 표정이 가슴 아팠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이영애의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은밀한 대사가 더 쫄깃쫄깃하게 들리는 건 무슨 이치인지 모르겠다. 흠흠흠. 자, 여세를 몰아 이은희의 끓이지도 않은 생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이유, 컵라면의 3분 상대성 법칙과 후회를 자아내는 나트륨 성분까지 읽고 나면 ‘라면 완전정복’의 쾌감을 맛보게 된다. 청춘의 어느 언저리에 열광했던 쿠베 로쿠로의 <라면 요리왕>을 다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른 질감의 포만감이 느껴진다고 할까.


    라면에 얽힌 추억담과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읽다 보니 나만의 ‘라면 한 그릇’도 불현듯 떠오른다. 아무에게나 양보하지 않고 아무하고나 함께 끓여먹지도 않는다는 라면을 우리 기쁜 젊은 날에 자주 같이 먹었던 한 사람. 한 번은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눈알 튀어 나오게 비싼 요리를 사주면서 그동안 라면만 사줘서 미안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이별의 불길한 예감. 얼마 못가 예감은 현실이 됐고 안타깝게도 그 후로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건 그 뒈지게 비싼 요리가 아니라 한 그릇의 라면이었다.


    이렇듯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나간 한 그릇의 추억이 모락모락 김을 피우고,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라면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도 알게 되고, 꿈을 향한 고단한 여정을 비춰주는 등불 같은 존재인 라면에 대해 애잔한 그리움까지 느껴지는 이 한 권의 책 <라면이 없었더라면>을 눈 내리는 이 겨울 밤 추천하는 바이다. 단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치미는 라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충동은 각자 알아서 다스릴 것.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으리.


    이글의 원문은 네이버 카페 '더라인 통번역 오픈케어'의 [박산호의 책과의 연애] (http://cafe.naver.com/thelineopencare/4219)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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