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과 관리

    기자칼럼 / 오현세 / 2014-08-01 16: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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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객원기자
    ▲ 오현세 객원기자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은 백성 사랑이 유별하셨던 세종대왕이 중국의 것을 원전으로 새로 주를 달아 펴낸 법의학 책이다. 무원록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을 없애려는 일념에서 편찬을 지시하신 것이다. 이 책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당시까지의 경험과 지식을 총동원해 조사 방법을 명기해 놓은 것으로 그 내용이 현대의 과학 지식과 일치하느냐와는 관계없이 대왕의 백성 사랑하는 마음에 다만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세종이 이 책을 펴내고 나서 예상치 못한 말썽이 생겼다. 이 책에는 상해로 인한 시신의 경우 상처의 모양으로 흉기의 종류를 판별할 것을 주문한 외에 상처의 길이, 깊이와 사인과의 인과관계를 추정하기 위해 눈금자를 이용해 상처의 깊이를 재도록 하고 있다. 이 부분이 문제가 됐다. 이 책이 나오자 상해사건 현장에 달려간 관리들이 조사의 정밀성을 기한다고 산 사람의 상처에도 시신의 검사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죽은 사람이야 상처를 쑤시고 헤집는다고 무슨 고통을 느끼겠냐마는 산 사람의 상처에 깊이를 재겠다며 눈금자를 꽂으면 어찌 되겠는가. 더구나 현장 관리들이 모두 숙달된 검시관이었을 리 만무하니 규정만 준수한다고 주변의 막대기를 주워 상처깊이를 재는 지경에 이르렀다. 칼에 배를 찔린 피해자의 경우 관리가 막대기로 다시 한 번 찔렀으니 그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짐작컨대 그로 인해 상처가 악화된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리는 필시 그랬을 것이다. “이 검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라님이 지시하신 규정이니 참으시오. 상처보다 막대기가 더 깊이 들어가면 아플 것이니 그때는 비명을 지르시오. 그러면 거기까지가 정확한 상처의 깊이가 될 것이니 참으로 면밀하지 않소? “ 나 같으면 흉기에 찔려도 막대기 든 관리 무서워 사건 신고 할 염도 못 냈을 것이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니 대신들이 세종께 그 방법의 사용금지를 간언하기에 이른다(1439.11.29.).

    세종은 대신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 방법의 사용을 금했다. 그제야 상처 입은 백성들은 관리들의 막대기 공포에서 벗어났다. 이 사실을 곱씹어 보았다. 도대체 이러한 보고를 받고 세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 죽은 사람 사인 규명을 위해 상처 깊이를 재랬더니 산사람의 상처를 쑤셔? 아무리 상처를 정확히 조사하란다고 어떻게 산 사람의 상처를 쑤실 생각을 하나? 기가 막혔을 세종의 답답함이 남의 일 같지 않다.

    학교 앞 호텔 건립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한 사업자가 영등포구 당산동 학교 근처의 오피스텔을 비즈니스호텔로 용도 변경해 달라고 구청에 요청했다. 현재 학교보건법은 교문에서 50m까지는 절대 정화구역, 50~200m는 상대 정화구역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중 상대 정화구역에는 호텔이나 유흥업소라도 ‘학교환경위생정화위원회’가 심의하여 학생에게 나쁜 영향이 없다고 판단한 경우에만 영업을 허용하고 있다. 바꿔 말해 학생에게 나쁜 영향이 없다고 판단되면 허가를 내주라는 말이다. 사업자는 구청에 허가를 받기에 앞서 이 부분에 대해 서울 남부교육청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법원은 일관되게 해당 호텔은 교육환경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최근 영등포 구청은 해당 사업자의 요청에 대해 불허 결정을 내렸다

    호텔로의 용도변경을 불허한 구청장의 불허 이유는 심의 결과라지만 그간의 보도를 보면 한마디로 인근주민들이 숙박업소가 생기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왜 반대하나? 숙박업소는 해당 지역 거주자의 편의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고용이 는다지만 타 지역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으면 뭐하나? 한마디로 공연히 왕래하는 차량만 늘어 날 뿐인데다 지역 주민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없으니 반대하는 것이다. 구청장 역시 마찬가지다. 신규투자로 인한 국부창출은 관심도 없다. 지역주민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허가를 내준다고 나라에서 상을 주나? 다음 선거 때 타 지역 주민들이 표를 주나?
    규정의 목적에는 사업의 타당성 판정 뿐 아니라 이러한 지역이기주의를 막고 사업자의 이익을 돌보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규정이 오로지 사업자의 목을 옭죄는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규제, 규정에 가로막혀 발을 구르는 사업이 한 둘이 아니다. 대통령이 완화를 호소해도 막무가내고 법원이 문제없다고 판결해도 마이동풍이다. 만사는 오로지 규정을 운용하는 관리 손에 달렸다.

    규정은 왜 있나?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 있는 것 아니가?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규정을 집행할 때는 그 규정이 왜 만들어졌는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 아니가? 규정이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관리들, 이런 생각조차 못하는 관리들의 손에 맡겨져 있다. 규정이라는 이름의 막대기가 지금도 백성들의 상처를 헤집고 있다.

    신주무원록으로 인한 소동을 보면 답이 나온다. 백성이 편하려면 관리를 없애든지 규정을 없애는 것밖에는 해결책이 없다. 관리들의 융통성 없는 돌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그리 똑 같은 지 그 불변성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다.

    세종대왕님, 한심한 관리들 때문에 얼마나 기가 막히셨습니까. 관리들의 막대기에 비명을 질렀을 백성들이 얼마나 가슴 아프셨습니까! 그런데 600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후손들도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부끄러워 대왕께 차마 아뢰기도 송구스럽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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