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세 칼럼] 영어 때문에 종로바닥에서 외로웠다

    기자칼럼 / 오현세 / 2014-12-05 15: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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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객원기자
    ▲ 오현세 객원기자
    한 국가의 존재가 대외적으로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 주변국의 언어, 즉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중요한 국책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제일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가 외국어 교육원인 사역원의 강화였다. 국가의 뼈대를 정비하느라 동분서주 하는 중에도 사역원의 조직과 운영방법을 세세히 지시한 것이 즉위 이듬해였으니 가히 국무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충렬왕 2년(1276)에 세워진 통역인 양성기관 통문관과 달리 외국어 통역과 번역을 맡는 관(官)으로서의 역할에 사대교린(외교)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더했다.

    역관의 경우 당시 가장 중요한 외국어였던 중국어 역관의 정원이 12명이었는데 세 계급으로 뽑았다. 제1과는 한 명, 제2과는 3명, 제3과는 8명을 뽑아 각각 정7품, 정8품, 정9품에 임용했다. 조선시대 관직을 요즘과 비교해보면 6품을 대략 지금의 사무관급으로 볼 수 있으니 7품 이하는 관직으로 보면 주사 급이요 대학교로 보면 조교수에서 강사급 정도로 볼 수 있겠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대단치 않다고 할지 모르나 간혹 역관이 정사가 되어 중국에 다녀오며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돌아오면 왕세자가 나가서 맞이해야 했으니 잡과 출신으로는 더 이상의 영예가 없었고 또 오가는 길에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물을 모아 실질적으로 조선 최대의 갑부 소리를 들었던 것이 역관이니 가히 중인계급으로서는 더 이상의 직업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만만치 않은 자리니 사역원 입학부터 역관에 임명되기까지의 길은 그야말로 가시밭이었다. 증조부, 외조부까지의 가족력에 이상이 없고 신원 보증서를 제출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졌으며 시험도 중국어 외에 사서, 소학, 이문(외교 격식 언어), 몽고어의 5개 과목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고도 15인의 면접관 중 3인 이상이 반대하면 입학을 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수없는 시험을 거쳐 최후의 관문인 취재시와 역과시를 통과해야 겨우 역관의 업무를 볼 수 있었으니 참으로 그 혹독함이 지금의 사시나 행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역관 이외에 외교업무를 위한 학생들도 이처럼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했으니 이들은 중국어를 얼마나 잘했을까! 펄펄 날았을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세종 조에 있었던 일이다. 사역원이 설치되고 어언 50여년이 흐른 뒤다. 당시 사역원의 도제조(지금으로 치면 총장)로 있던 신개가 세종 임금께 올린 상소문을 보면 기가 막힌다. 10년 공부한 학생이 두어 달 중국에 다녀온 사람보다 중국어를 더 못하니 이를 바로잡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신개가 역설한다. 사역원에서 공부할 때는 중국어를 구사하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말을 하니 말짱 헛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교육방법을 제시했다. 사역원에서는 선생이나 학생이나 막론하고 중국어만 사용한다. 선생이 우리말을 하다 적발되면 1차 경고 후 기록, 2차 종 한명 투옥, 3차 종 두 명 투옥, 4차 종 4명 투옥, 다섯 번째는 형조에 넘겨 투옥한 후 파면하고 1년간 재취업을 금한다. 학생이라면 곤장을 친다. 당시 종은 한 집안의 경제력이었다. 종을 투옥한다는 이야기는 지금으로 치면 벌금형에 해당한다고 보겠다. 결국 사역원내에서 우리말 쓰다 걸리면 벌금을 물리고 마지막에는 감옥에 가두거나 매를 때리겠다는 이야기다.

    당시 신개가 개탄했던 외국어 습득 과정과 작금의 영어교육을 비교해 보자. 공부 양으로 보면 지금의 학생들은 유치원 무렵부터 원어민을 찾아다니고 초등학교 내내 온갖 영어 학습지에 학원을 순례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영어를 최우선으로 배우고 대학에 들어가서도 텝스니 토익이니 영어 하나에 목숨을 걸고 있으니 당시의 사역원 학생들에 비해 결코 덜함이 없겠다. 그러다 막상 회사에 들어가 외국인이 전화하면 동태가 되어버리니 사역원 공부 10년에 두 달 중국 다녀온 사람보다 중국어를 못한다고 신개가 분노한 당시의 학생과 어쩌면 그리도 똑 같은가. 아무리 돌고 도는 것이 인간사라지만 어쩌면 7백 년 전과 오늘날의 현실이 이리도 똑 같은가.

    1442년 2월 14일, 세종대왕께서 신개의 상소를 흔쾌히 받아들이니 사역원은 하루아침에 중국어 마을로 변했고 이후 훌륭한 역관들과 인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 외국어는 일상어가 되지 않는 한 결코 익힐 수 없음을 간파한 신개와 세종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온 국민이 영어권 작가가 될 것도 아닌데 지금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은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느 정도 이상의 외국어는 꼭 필요한 사람만 하면 된다. 외국인과 단순한 일상사를 가지고 소통하는 데는 중학교 영어로 충분하고 고등학교 영어까지 배우면 넘치고 넘친다. 사역원에서 사용한 교재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처음 입학한 학생들을 위해 사용한 중국어 기초 교재는 노걸대(老乞大)라는 책이었다. 고려 때 만들어진 책으로 요즘말로 하면 ‘미스터 중국인’ 정도의 뜻이다. 이 책은 철저히 회화 중심으로 되어 있다. 첫 부분을 보면 이렇다. 大哥從那裏來 “형씨 어디서 왔소?” 我從高麗王京來 “나는 고려 개성에서 왔소.” “이제 어디로 가오?” “북경으로 가오.” “언제 개성에서 떠났소?” “지난달 초에 떠났소.”(이하 생략). 이외에 여관을 찾는 법, 인삼을 소개하는 말, 말을 사고파는 일 등 전부가 상거래에 필요한 일상어 회화다. 외국어 공부의 기초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본 것이다. 그 후에는 박통사(朴通事)라는 교재를 통해 보다 고급스러운 중국어를 배웠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외국어 교육방법은 일상 회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며 그만 그 훌륭한 전통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 후로는 다 알다시피 문법을 달달 외우는 일본식 교육으로 바뀌었고 그것을 아직까지 답습하고 있다. 게다가 평생 영어를 제대로 한번 써먹을지 기약도 없는 온 국민한테 별별 영어를 다 가르친다. 지금의 대학 입시 문제를 보면 영문과를 나와 십 수 년을 외국회사에서 일한 필자가 봐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런데도 만점자가 수두룩하다. EBS교재를 달달 외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도 풀기 힘든 문제도 순식간에 정답을 골라내는 신기를 연마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렇게 배운 영어를 어디다 써먹자는 것인가? 만약 우리나라 온 국민에게 영어가 절대로 필요하다고 한다면 영어를 국어로 삼을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어를 우리의 일상어로 삼지 못하겠다면? 영어 교육을 일정선에서 중단해야한다. 입시와 취직시험에서 영어의 가중치를 현격히 내려야 한다. 그래야 다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그래야 사람이 된다. 온 국민을 영어 문제 잘 푸는 기술자, 번역기로 만들지 말고 사람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영어 점수를 올려주겠다는 전단지들이 낙엽보다 많이 날아다니는 종로거리를 걷다보니 갑자기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영어 번역기들만 보였다. 한없이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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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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