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현세 칼럼] 잔인함과 용감성에 대하여

    기자칼럼 / 오현세 / 2015-02-09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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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현세 객원기자
    IS의 잔인함이 도를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곳곳의 젊은이들이 IS에 가담한다고 난리들이다. 잔인함을 남자다움, 용감성이라고 착각하는 탓이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착각이야말로 IS의 존재보다 더 두려운 비극이 될 가능성이 있다. 우리나라 청소년 한명이 연계되었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들린다. 그의 부모를 생각하면 남의 일이 아니다.

    모든 동물의 행동원칙은 단 하나,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다. 도피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과 맞서는 동물은 없다. 동물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는 도망갈 길이 없을 경우뿐이다. 도망갈 기회가 있음을 알고, 또 도망가지 않으면 죽음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피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이다. 인간만이 지닌 이 고유한 특성을 우리는 용감성이라고 부른다.

    자신과 가족의 생명과 땅을 지키기 위해 인류가 투쟁을 시작한 이래 이 용감성이 경시된 적은 한 번도 없었겠지만 우리에게는 일제의 굴욕과 육이오 전란을 겪으면서 용감성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수적인 덕목으로, 특히 남자에게는 최고의 덕목으로 자리 잡았다. 남자에게 용감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그의 다른 모든 장점을 일거에 지우고 매장시키기에 충분한 치명적인 말이다.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말은 감내할지언정 비겁하다는 말에 순응하는 인간은, 적어도 남자는 없다.

    남자에게 이러한 특정한 덕목, 용감성을 주입시키기 위해 부모들은 일찍부터 아이들을 단련시킨다. 아이가 또래에게 맞았다고 하면 꼭 물어 보는 것이 상대도 때려 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아이가 맞은 원인은 그 다음이다. 이론적으로는 자기 아이가 의당 맞을만한 짓을 했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수긍하면서도 맞았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분노가 논리적 사고를 가리는 이런 반응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당연하지만 생존본능 때문이다. 맞다보면 인간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설령 이치에 어긋나더라도 상대를 제압함으로 아이가 설 자리를 확보하길 바라는 본능 때문이다. 때문에 남자들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상대를 제압하라고, 그것도 기회가 있으면 철저히 분쇄하라고 배운다.

    이렇게 자라는 남자 아이들의 역학관계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말이 “깡이 있다”와 “악바리”라는 말이다. 둘 다 비슷하다. 이들의 특징은 다툼이 일어났을 때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폭력을 행사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소위 “아작 낸다.”라는 표현이 그런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아작은 단단한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에서 생긴 말이다. “아작 내다”는 말 그대로 부셔버린다는 말이다. 함부로 쓸 수 없을 만큼 잔인하고 섬뜩한 말이다. 주변 아이들은 이런 아이들은 건드리면 손해 본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아이들은 점차 경외의 대상이 되고 용감한 아이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당사자들은 스스로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게 된다. 잔인함과 용감성을 동일시하는 이런 비극이 바이러스처럼 남자들의 성장 과정에 퍼져 나간다.

    20세기 들어 심리학자들이 규정한 용감성의 긍정적인 첫째 심리 상태는 자신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감이 용감성의 첫 번째 토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용감성을 발휘하는 방법의 정당성과 효율성에 대한 고찰이 빠졌을 때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 한다”라는 도그마가 생기고 이를 믿음으로서 기회가 왔을 때 상대를 철저히 분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감성이자 남자다움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폭력배들에게나 어울리는 사이비 용감성이 바로 그것이다. 잔인함을 동반한 이러한 사이비 용감성과 진정한 용감성에 대해 성찰한 사람이 몽테뉴다.

    최초로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로서의 글을 쓴 사람, 진정한 수필가의 효시로 불리는 몽테뉴는 수상록을 통해 용감성, 용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용감성은 상대를 제압하는 것으로 더 이상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상대가 다시 일어나 덤벼도 언제든 자신을 방어하고 다시 제압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넘어진 틈을 타 철저히 무너뜨리려는 것은 상대가 다시 일어나 공격해 올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용기 있는 자는 결코 상대의 반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관대하다.” 그러하다. 패배한 상대를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드는 것은 용기의 결여, 즉 비겁함 때문이다. 상대가 다시 일어난다면 두 번 다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넘어진 상대를 짓밟는 비겁함으로 표출되고 이를 용기라고 스스로 기만하는 것이다. 상대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철저히 짓밟는 잔인함이 남자의 용기라고 착각하고 있던 어린 시절, 그것은 용감성이 아니라 비겁함이라는 몽테뉴의 글에서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무장 민간인에게 잔인한 폭력을 휘두르는 IS의 행위는 절대로 용감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비겁함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비겁함에서 도망치려는 자 일수록 더 잔인하다.

    네가 맞으면 남도 때려라, 그것도 아주 “혼쭐이 빠지게”라고 부추기는 어른들, 툭하면 사생결단을 하겠다거나 철저히 상대를 박멸하겠다며 무지한 대중을 이끄는 사이비 용감한 어른들이 횡행하는 사회, 힘을 가졌을 때 철저히 약자를 짓밟는 비겁한 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요원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우리 청소년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용감성은 어떠함에서 비롯되는 것인 지, 그리고 그러한 용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자신을 어떻게 갈고 닦아야 할 것인지 곰곰 생각해 달라고. 그래서 적어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더 이상 잔인함을 용기와 착각함에서 비롯되는 비극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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