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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벽돌로 지은 북촌전시관에서 그를 만났다.
'이두수', 66년생. 직업은 건설 현장 노동자다. 그는 매일 현장에서 노동을 한다.
그리고 그림 역시 매일 그린다.
"이두수는 어떤 사람인가?"물었다.
"이렇게 살다보니 직업적 정체성이 모호해지기는 해요. 그림을 그리는 노동자인지 노동을 하는 그림쟁이인지.. 그래서 '내가 뭘로 돈을 버는가' 봤더니, 현장 노동으로 대부분의 돈을 벌고 있네요. 그러니 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노동자인거지요. 제게는 이번이 두 번째 전시인데,전업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분들에게 누가 되는 일이 아닌가하는 걱정도 있네요. 저는 그냥, 저를 '노동의 연장선상에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으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보통의 미술 전시는 늘 있었지만 이번엔 참으로 생소한 전시다.
작가의 차림새가 일견 남루하고, 모델이 생소해서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그림 전체의 배경이 공사장이며 모델도 공사장 인부, 작가 역시 그러하다.
전시 제목은 <뒷모습만 봐도 그의 하루가 보인다.>이다.
특정한 여자의 뒷태를 보면서 그녀의 하루를 상상해본다면 훨씬 더 흥미롭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후두둑 접었다.
이두수!
그의 주문대로 전시장에서 만난 그를 돌려세운 뒤 그의 뒤태(?)를 보니... 참, 지독히도 외롭다!
그의 서늘한 등짝에서, 어깨에서, 작업화 안에서, 또 따로 노는 종아리에서까지도 외로움이 뚝.뚝. 흐른다.
"하이고! 외로울 새가 어딨어요? 5시에 기상해서 세수만 하고 현장으로 투입되면 오후 네시 반까지 중노동에, 그거 끝나면 씻고, 운동하고, 책보고, 그림 한 점 그리고난 뒤에 잠자고..."
그의 말처럼 그의 일상은 외로울 새가 없을 듯 싶다.
더구나 단순함을 극복하기 위해 행하는 독서와 운동, 취미로 시작한 5km 하프 마라톤으로 풀코스 42,195km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매일 그림 한 점까지, (그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엔 날짜별 숙제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소위 '노가다'라 불리는 건설현장 노동을 하는 그가, 그렇게 매일을 살며 그림을 그리다가 급기야 전시까지 하는 작가가 되었다.
첫 전시는 작년 11월, 원주 '치악예술관'에서 치렀다. 120점을 걸었고 12점을 팔고 나서 문득 든 생각, "세상 참 살 만 하다!"
그의 이름은 '두수'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름 속 '두'자는 북두칠성 의 '두'에서 따왔다고 덧 붙였다. 그 말은 분명 '두'자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뜻 일거다.
빛나는 별 일곱 개가 모여 국자 모양을 이룬 별 북두칠성과 가장 가까운 마을 이라 믿는 '두촌'에서 따온 그의 '두'자 탓일까.
그는 '퍼주기'와 '방랑'이라는 DNA를 지니고 태어난 듯 하다.
서울로 유학을 와서 경희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며 야학 활동을 했다.
그 곳에서 경희대로 유학을 온 일본 여자를 만나 결혼, 일본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의 호기심은 벌써 뉴욕에 가 있고 이어서 그의 몸도 '아메리카'를 향했다.
뉴욕에서 공부를 하겠다던 그가 본의 아니게 시카고 한인회의 기획 실장이 되고 나서부터 '퍼주는 일'을 직업적으로 하게 되고 그 전문성이 돋보인 계기는 2011년 3월, 일본의 동북대지진 이후다.
즉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 최고의 스타들을 일본에 집결시켰지요. 지진의 공포에 사로 잡혀 트라우마를 겪는 일본인들과 우리 교포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동경에서 '동경전설'이라는 타이틀로 이벤트를 저질렀습니다. 당시 최고의 스타 그룹이던 '동방신기' 부터 '2PM', '카라', '시스타', '제국의 아이들', 'SG워너비'등을 총동원 시켜 콘서트를 열었고 좌절하던 지진피해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었지요. 그 여파로 일본에 한류를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구요."
그 이후로 그는 국제적인 '퍼주기' 전문 단체에 소속되어, 본격적으로 전문화된 국제 조직의 '퍼주기 활동가'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프리카 아시아 난민교육 후원단체(ADRF) 사무국장이 되어 8년 간 활동했던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아프리카,아시아 난민까지 챙기는 동안 가족들은 일본에서 어찌 살아 냈을까요?"
'올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던 그가 대답했다.
"집은 있는 난민처럼요!"
여전히 직장 생활을 하는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은 동경에서 또아리를 틀고 잘 살고 있지만, 이제는 가족을 위해서만 돈을 벌기로 작정을 하고 건설노동자의 길을 선택한 지 이제 5년, 비오는 날 함바집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울컥하다가 문득 불어터진 라면을 쏟아버리기도 하는 갱년기 사내의 때늦은 집안 걱정이 안쓰럽다.
사람들이 묻는다.
전시장에서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특별한 소재를 찾아서 건설현장 노동을 하는거냐?"고.
또 현장숙소에서 함께 일하고 밥먹고 잠을 자는 동료들도 그에게 묻는다.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노가다'를 뛰는거냐"고.
그럴때마다 그의 답은 늘 같다.
"아니고요, 돈 벌려고 일하는거여요. 명색이 경영학을 한 사람인데 온전히 나를 위해 돈을 벌어 볼려 했더니, 이 나이 먹고 노동밖에 생각이 안 나서요. 내 몸으로 정직하게 노동하고 가족들이 좀 더 편안해진다는 게 행복 하잖아요."
그가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다.
"다양한 일들이 주어지는데 그 때마다 남들보다 잘 할 수 없으니 그림으로 학습효과를 높여 실수를 줄이는 기회가 됐고, 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완벽을 향한 열정을 담고 싶었어요. 그리고 완성된 후 이 집에 들어와 살게될 사람들이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집을 지은 걸 알면 더 행복해 하겠지, 생각하면 기분이 좋지요. 더 완벽하게 하고 싶고요."
"아! 정말 그런 아파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따뜻하게 스며든다. 세상에 따뜻한 '노가다'들이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특이한 '노가다'.
이두수의 전시장엔 매일 매일 그림이 사라진다.
현장에서 모델이 된 동료들이 그림을 사 가지고 떼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전시는 어쩌라고? 전시 끝나면 보내 준다고 !" 이러면 "이거 가지러 또 못와! 그리고, 내 다음 현장이 어딘지 알고 보내? 그냥 빈 자리에 사진 출력해서 붙여놓으라고. 나는 간다!"
역시 '노가다' 답다!
언젠가는 이 '따뜻한 노가다' 들이 마음모아 지은 집이, 엄청난 프리미엄이 붙어 팔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아파트 입주자들에게 이두수의 그림을 선물하는 건설 회사를 만나게 될 것 같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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