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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18대 국회의원이 되면서 결심한 게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입법 발의조차 최대한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만일 그 다음 국회에서도 계속해서 활동했더라면 한국 정치에서 고쳐야 할 대표적인 악습 중의 하나가 지나치게 많은 입법 발의와 처리라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의원들은 정반대로 하고 있다. 당시 한 의원은 매주 1건 이상 법률안을 발의한다고 자랑하듯 말하는 것도 보았다.
국회의원이 법률안을 발의하는 행위는 법률 제·개정을 위한 공식적인 절차다. 국회를 입법기관이라고 별칭하듯 그 본연의 임무로서 발의에 남달리 공들이는 의원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각종 의안까지 포함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엄청난 양이 쏟아지고 있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국회에 대해 불만이 극심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도대체 일은 하지 않고 싸움만 한다”는 것이다. 국회를 감시하겠다고 나서는 각종 시민단체들도 그 평가 기준으로 본회의·상임위원회 출석 여부와 함께 법률안 발의를 가장 집중적으로 따진다.
그러다보니 의원들은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입법 발의 건수 늘이기에 열심이다. 결과적으로 가결되어 처리되는 법률도 그만큼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리 국회를 두고 과거와 같은 통법부로 비판받던 오명에서 벗어나게 만들기도 했다.
국회의원의 법률안 발의와 가결(처리) 통계 자료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11대 국회(1981~85)에서 발의가 204건, 가결된 의안이 84건이었던 것이 17대 국회(2004~08)에서는 발의 6387건으로 31.3배가, 가결된 의안이 1350건으로 16.1배로 늘어났다. 국회의원 1명당 발의가 0.7건으로 1건이 채 안되다가 21.4건으로 급증한 것이다. 그러나 제출된 법률안이 가결된 비율은 형편없이 하락해 11대 41.2%에서 17대엔 21.1%로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이후 발의 증가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단순 발의와 처리 건수를 모두 합쳐 비교해 보면 17대 국회에서 발의 7489건, 처리 3773건, 법안처리율 50.4%에서 18대 국회에서는 각각 1만3913건, 6178건, 44.4%였다. 19대는 발의 1만7822건, 처리 7429건, 법안처리율 41.7%였고, 임기만료로 계류 중이다 자동폐기 된 경우만 해도 1만393건 58.3%에 이르렀다. 20대 국회에서는 발의 24141건, 처리 8799건, 법안처리율 36.5%였고, 자동폐기 된 게 1만5262건에 달했다.
한국 언론의 정치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할 정도로 집요하면서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여전히 법률안 통계를 놓고 ‘게으른 국회’로 보도하는 게 흔하다. 이는 사실과 너무 틀리다. 법률안 발의와 처리 측면에서 보자면 의정 활동에서 날이 갈수록 비약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고 칭찬 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가결률에서는 떨어지지만, 의원들이 너무 열심히 법률안을 제출해 심의와 합의 과정을 통해 처리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이제부터라도 본질을 봐야 한다. 법은 규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국회의 법률 제·개정은 결국 그 성격상 규제를 생산하기 마련이다. 특히 국가에서 가하는 최상위의 구속력인 법률을 마구잡이로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바람에 행정부의 규제가 그만큼 늘어나고, 국민은 그만큼 더 구속받는 한편 기업과 시장은 그만큼 더 활동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주요 정치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자. 연평균 법안 발의와 처리에서 미국은 각각 2000~3000건과 300~400건 정도다. 일본은 발의까지 포함해서 매년 각각 100건을 넘지 않는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의 경우도 비슷해서 발의든 처리든 100건 정도를 오르내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지금 한국은 국회의원의 법률안 발의와 처리 폭주로 입법 홍수 사태에 빠져 있다. 더 이상 방치할 것이 아니라 입법 폭주 상황을 막아야 한다. 너무 손쉽고 편한 발의 절차부터 손봐서 발의하고자 하는 의원 1명이 동료 의원 9명의 서명만 받으면 곧바로 제출할 수 있는 요건부터 고쳐 어느 정도 검토 과정을 거친 법률을 발의하게 그 요건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특히 가결 과정에서 충분히 살펴보고 나서 정치적 과정을 거쳐 처리되도록 해야 한다.
언론과 학계에서도 할 일이 있다. 이렇게 방만한 입법 발의 사태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는 국가운영을 복잡하게 만드는 짐이 되는 한편 국민 개개인의 생활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규제의 족쇄를 늘이게 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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