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6-16 19:3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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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4) 웅변왕, 그 공포의 입

    방안에 마주앉은 두사람은 어슴푸레한 호롱불 밑에서 문제의 편지 내용을 꼼꼼히 검토해보기로 했다.

    조용석이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구절과 구절들을 주의 깊게 귀담아 듣고 있다가 가슴에 와 닿는 대목들을 고정관은 난렵하게 수첩 갈피에 적어 넣는 것이었다.

    다소곳이 수그린 얼굴은 굳어져 있었고, 양쪽 귀는 쫑긋 세워져 있었고, 만년필을 잡은 손 끝은 수전증환자처럼 떨고 있었다.

    조용석이 편지를 다 읽었을 때 고정관의 받아쓰기 작업도 일단 마무리가 되었다.

    편지 내용을 간추린 메모의 항목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고정관과 조용석은 고향사람들의 기대와 촉망을 저버리지 말라.

    ②겸손하고 어려워할 줄 알아야 할 너희들인데, 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 설쳐대고 있느냐.

    ③죽고 싶어서 환장했다면 모르지만, 방준태씨가 살해된 사건현장에 왜 나타났었느냐.

    ④달미동의 이양국부자를 만나도 도움되지 않는다는 사실 알고 있어야잖겠느냐.

    ⑤9월 말일 안으로 고향을 떠나라

    ⑥고향을 떠나지 않고 개죽음 당했을 때 우리는 책임질 수 없다.

    위와 같이 6개 항목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내용을, 익명의 발신인은 군더더기를 붙여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이었다.

    “어이, 용석이 자네! 이 중에서 핵심을 지적해보게, 자네의 소감부터 들어보고 싶군!”

    고정관이 군침을 꿀꺽 삼키고 채근을 했다. 조용석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형님이 메모한 그대로 6개항이 편지의 뼈대를 이루고 있어놔서, 어느 1개항만을 족집게로 집어내듯 잘라 말하긴 어려울 것 같네요. 그러나 굳이 한가지 핵심을 가리키라고 한다면 저는 제3항을 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익명의 발신인은 우리 두 사람을 방준태 피살사건과 연관지으려는 속셈이, 짙게 깔려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이 편지는 시험용 애드벌룬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 같거든요. 발신인은 우리더러 고향을 떠나라고 공갈협박식 용어를 동원해서 압력을 넣고 있지만, 이것은 함정이라구요. 우리는 절대로 고향을 떠나면 안된다고 봅니다. 살인범으로 몰릴 것이 명약관화하니까”

    조용석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견해에 공감이 간다는 뜻으로 고정관도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상대방의 생각하는 것이 틀에 짜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일치하고 있어서, 조용석이 정곡을 찔렀다는 사실을 고정관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거리지 마시고 형님도 소감을 말씀해 주셔야지요. 어쩌면 형님이야말로 귀신도 깜짝 놀랄만한 기막힌 소감을 피력 하실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더 이상 무슨 묘안이 나올 수 있겠느냐 싶으면서도, 조용석은 ‘고양이 쥐 생각’하는 식으로 슬쩍 한마디 던져본 것이었는데….

    “내가 할 소리 자네가 다 해 버렸거늘 무엇을 말하라는 건가? 권력으로 자네의견과 나의 소견이 딱 들어맞고 있다는 말 밖에 별로 할 말이 없네만, 굳이 덧붙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대목을 지적하고 싶네, 뭔고 하니 고향을 떠나라는 대목이 발신인의 요망사항임엔 틀림없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범죄사건과 연관지으려는 의도와는 각도가 같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구, 무슨 뜻이냐고 하면 우리를 살인사건과 연결시키겠다면서 엄포를 놓아 줄행랑을 치게 하자는 수작이 아닌가 싶어.

    녀석은 우리를 제거하려는 차원 높은 술수를 쓰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는 작자임에 틀림 없다구, 어느 수준의 인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무서운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는 자라는 생각이 든단 말야. 조만간 정체가 드러났겠지!”

    고정관은 짚이는 게 있는 듯 히죽 웃었다.

    사실 범죄의 혐의점도 내세우지 않고 협박편지를 보냈다는 자체는 사건과 무관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형님 판단이 옳다고 봅니다. 이제부터 발신인 추적을 서둘러야 되지 않을까요?”

    조용석이 엄숙해진 모습으로 고개 숙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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