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7-21 18:15:31
    • 카카오톡 보내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2) 7년 가꾼 순정의 꽃

    50m 저쪽에서 숨가쁘게 달려오는 검은 그림자. 목소리가 말해주듯 그것은 여자. 날씬한 몸매에 허여멀쑥한 얼굴의 젊은 여자가 아닌가. 혹시 악당에게 쫓기고 있는 여자?

    그러나 이만성은 발꿈치를 들고 여자의 뒤쪽을 바라보았지만, 괴상한 그림자는 보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아니고 도깨비? 대낮이라면 두려울 것은 없다. 그러나 백귀가 덤벙거리기 알맞은 깊은 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모의 여자가 뒤쫓아왔다는 사실은 결코 예삿일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어쩌면 여우, 꼬리 9개 달린 구미호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개 속 같은 불투명하고 혼미한 시대인데다 자정으로 접어든 깊은 밤이라놔서…. 귀신이나 여우가 아닐진대,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겁도 없이 사내 대장부의 발길을 멈춰서게 한단 말인가?

    이만성은 머리털이 쭈뼛 일어서며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옛날 옛적,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전 한남마을에 여우가 나타났었다는 얘기를 ‘영재의숙’에 다닐 때 백발 노인들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이 마을의 터줏대감 강직(姜直)이 말을 타고 ‘대정고을’에 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가 마을어귀에 다가왔을 순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불쑥 나타났다.

    “살려주세요, 영감님! 저는 지금 날강도에게 쫓기고 있어요. 잡히면 저는 죽는다구요. 그 은혜 잊지 않을 테니 도와주세요 네!”

    여인은 승낙을 받기도 전에 나는 듯이 안장위로 뛰어올랐다. 호박이 덩굴째 굴러든 것일까? 강직은 여인을 뒷자리에 태운 채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꽁꽁 묶었다. 여우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강직의 집에서는 호랑이 같은 두 마리의 사냥개가 주인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람이냐? 여우냐? 판가름은 개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강직은 설레는 가슴을 안고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

    눈 깜짝하는 사이, 말은 대문 앞에 달려가서 발걸음을 멈췄다.

    두 마리의 개가 비호같이 뛰쳐나왔다. 여인이 말에서 내리기 바쁘게 두 마리의 개가 그녀를 덮쳤다. 꼬리 9개 달린 여우였다. 여우는 뼈대도 못 추리고 개들의 밥이 되고 말았었다는데….

    그 망령이 3백년을 지난 오늘밤에 두 번 죽으려고 나타났단 말인가? 강직에 얽힌 에피소드를 떠올리면서 굳어진 얼굴로, 이만성은 엉거주춤 멈추어 서있었다. 이윽고 여자는 코앞까지 뛰어와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놀라시게 해서…”여자는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누, 누구시오? 무슨 일로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저를 모르시겠어요? 찬찬히 제 얼굴을 들여다보세요. 여우가 아니라는 사실, 금세 아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귀신이란 말인가? 사람의 속마음을 유리알 들여다보듯 훤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을 보면 여우는 아니고, 귀신에 가까운 존재…? 다음 순간, 이만성은 여우든 귀신이든 두려워 할 것 없다.!

    죽기 아니면 살기일터인데, 어디 한번 맞닥뜨려볼까? 하고, 마음을 굳히자 온몸에서 힘이 솟구쳤다.

    그는 윗몸을 약간 구부려서 여자의얼굴을 훑어보았다. 플래시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얼굴의 윤곽을 가늠할 수 있었다. 17∼18세? 이마에 솜털이 보스스한 앳된 얼굴, 첫눈에 보기 드문 미인이구나! 하고, 절로 탄성이 새어나오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누, 누구신지?” 떨리는 목소리로 짤막하게 물었다.

    “모르고 계시는군요. 모르시는거 이해할 수 있어요, 어느덧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잖아요. 저, 영선이에요 김영선”

    “아가씨의 이름이 김영선…?”

    어쩌면 여우도 귀신도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러나 김영선이라는 이름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김종선은 기억할 수 있겠어요?”

    “김종선? 음, 생각이 날 것 같긴 하지만 당장은…”

    이만성의 얼굴에 차츰 밝은 빛이 떠오르고 있었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