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14)-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1804~1869)

    칼럼 / 김유진 / 2010-03-02 16: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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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53-1857/ 단임 / 민주당.

    14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1852년의 선거는 이변의 연속이었다.

    무명의 피어스가 민주당의 후보 지명을 받은 사실이나 최종투표에서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게 된 결과들 모두가 일반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특히 민주당의 당내 경선은 무려 마흔 아홉 번이나 예비투표를 치르면서 베일에 싸여있던 의외의 후보 피어스를 선출하게 된다.

    그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에 나선 다른 후보들이 높은 인지도는 있었으나 약점들이 노출되어 이미 경쟁력을 잃어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낮은 인지도의 피어스는 바로 이런 점에서 득을 보게 된 케이스였다.

    본선의 결과 또한 흥미롭다. 51대 44의 다소 팽팽한 접전을 보여줬던 국민투표와는 달리 31개주에서 27개주를 석권하며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마 이런 현상은 미국의 특별한 간접선거제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48세의 젊은 대통령 피어스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를 기록하며 14대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그의 최연소 기록은 얼마 후 율리시스 그랜트에 의해 바뀌게 되고 또다시 존 에프 케네디에 의해 갱신된다).

    피어스는 1804년 뉴 햄프셔의 한 오두막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농부였는데 민병대에 입대하여 독립전쟁에 참전한바 있으며 나중에는 뉴 햄프셔 주지사를 두 번이나 지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여덟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피어스는 네 명의 형제와 세 명의 누이를 두고 있었는데 조지 부시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바바라 부시’가 먼 친척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는 또 미국 최초의 19세기 출생 대통령에다 또 동시에 유일한 뉴햄프셔 출신의 대통령으로도 남아있다.

    그는 매우 동안이어서 ‘베이비 피어스’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사가들에 의해 깨끗한 이미지에 남에게 싫은 소리 안하고 항상 밝으며 기분 좋게 다가가는 점잖은 인품의 소유자로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그는 대부분의 다른 역대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교육의 기회를 얻게된다.

    유명한 필립스 엑스터를 나오고 보우드인 칼리지에서 문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뒤 메사추세츠의 노담톤 로스쿨에 진학하여 변호사가 된다.

    그의 학창시절이 눈부시게 훌륭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번은 보딩스쿨(기숙학교)에서 집 생각에 못 견딘 그가 한밤중에 맨발로 집을 찾아 오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없이 그날 밤 다시 그를 학교로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그는 또 대학에서 최하위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정치인생은 대학졸업과 함께 바로 시작한다.

    뉴 햄프셔 주 하원과 상원을 차례로 거치고 27살의 나이로 또 역시 최연소를 기록하며 연방 하원에 진출한다.

    두 번의 하원 임기를 거친 뒤 연방상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후 뉴 햄프셔 주지사의 후보 지명과 연방 검찰총장의 지명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1847년 미 육군 준장에 임명되어 미국-멕시코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하게 된다.

    전쟁 중에 그는 낙마하여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는데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끝내 기절하고 만다.

    기절한 그는 병사들에 의해 안전지역으로 옮겨져 간신히 생명을 건졌다고 한다.

    그의 이날 이미지는 전쟁영웅 대통령들과 비교되면서 그로 하여금 정치적 비중을 한 단계 레벨 업 하는 계기가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그를 대통령 감으로 생각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뚜렷한 성향도 없었고, 이미 십 년 동안이나 정치권을 떠나 있었던 터라 감이 떨어져 있었고, 또 전쟁영웅이라 하기에도 왠지 그 공적이 좀 애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이어 열린 민주당의 전당 대회는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기존의 유력한 후보였던 ‘스테픈 더글라스’, ‘윌리암 마시’, ‘제임스 부캐넌’, 그리고 ‘루이스 캐스’의 후보 네 명이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뒤엉켜 아무도 선두로 치고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유는 진부한 그들의 경쟁이 당원들을 싫증나게 하였고 또 새로운 인물을 원하게 하였다.

    이때 혜성같이 출현한 이가 바로 인물 좋고 매너 좋은 피어스였다.

    더구나 그의 참전경험은 근사하게 포장이 될 경우 대국민적인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료로 사용 될 수 있기 때문에 피어스에 대한 관심도는 급증하게 되었다.

    결국 마흔 아홉 번에 걸친 경선은 피어스를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남부와 북부 양쪽의 입맛에 맞게 움직여야 했던 본선에서는 양쪽 후보 모두가 서로의 차별화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군 경력 또한 서로 비슷해서 특별한 동력이 되질 못했다.

    그 와중에 피어스의 호감 가는 외모와 신선함은 큰 득이 되었고 민주당은 ‘제임스 폴크’때와 마찬가지로 피어스를 정체되어 있는 정국에 활로를 트고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얼굴로 선전하며 선거에 임한다. 결과는 대승! 비록 국민투표에서 큰 표 차이를 보이지는 못했지만 31개 주중에서 27개 주를 승리하여 그 대의원 표를 모두 가져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대선승리의 기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큰 불행을 겪게 된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다른 두 자녀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 숨졌음) 벤자민이 열차사고로 눈앞에서 참혹하게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 사고로 그의 부인 제인은 우울증으로 평생을 고통받게 된다.

    피어스 역시 슬픔에 찬 대통령 취임식을 갖게 되는데 제인은 이 사고를 피어스의 정치활동이 부른 신의 노여움이라 믿고 정치를 증오하게 되고 두고두고 피어스의 정치활동을 방해 하기도 한다.

    다소 소극적으로 변한 그는 주요 쟁점들에 대해 특히 노예제도에 대해 정확한 자기입장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역사가들의 의견이 또한 분분하다.

    그가 겪은 가족의 불행이 주된 원인으로 무심한 대통령이 되었다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남에게 척지고 살지 못했던 그의 타고나 성격이 서로 죽일 듯이 으르렁대는 대결구도에서 화해의 길을 찾고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또 하나이다.

    별다른 업적 없이 그의 임기는 그렇게 끝나고 부인 제인과 장기간의 해외 여행을 한 뒤 삼 년 만에 여행에서 돌아온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주변에서는 그에게 다시 대선에 출마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고사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64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프랭클린 피어스’, 호감 가는 외모에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로 누구하고도 등지는 것을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어지럽기만 했던 세상은 그를 줏대 없고 소심한 대통령으로 평가를 받게 하였다.

    전쟁을 반대했기에 링컨을 비난했고 극단적인 방법보다 평화로운 해결책을 우선 했던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만약 남북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수많은 인명의 손실과 피해를 피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남부와 북부가 적절한 화해과정을 거치고 수년 뒤 자연스럽게 노예제를 폐지하고 오늘에 이르렀다면, 그래도 그가 지금처럼 못나게 평가를 받고 있을까? 사뭇 궁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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