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대왕의 못다핀‘북벌의 꿈’

    기획/시리즈 / 전용혁 기자 / 2011-02-14 16: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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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취적 기상, 여주‘효종대왕릉’을 찾아서
    [시민일보] 녕릉(寧陵, 효종대왕릉)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소현세자가 돌아가자 왕세자로 책봉됐으며, 1649년 조선조 제17대 왕으로 즉위해 1659년에 승하(재위 10년, 41세)했다.

    효종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당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림)의 치욕을 씻고자 불벌을 꿈꿨던 인물이다.

    따라서 <시민일보>는 효종대왕릉을 통해 효종의 북벌의 꿈을 소개해본다.
    ◆ 효종대왕릉(寧陵)으로 가는 길
    효종대왕릉에 이르는 길은 세종대왕릉을 거쳐 가는 방법(세종대왕릉 능침아래에서 효종대왕릉으로 통하는 오솔길)과 효종대왕릉으로 직접 통하는 방법(세종대왕릉 주차장에서 효종대왕릉 매표소에 이르는 오솔길)이 있다.
    그렇지만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을 관람하는데는 어느 방법을 택하든 관계는 없다.
    세종대왕릉 주차창에서 500여m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효종대왕릉 매표소에 이른다.
    효종대왕릉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에 보물제1532호로 지정돼 있는 ‘조선효종녕릉재실’을 만난다. 재실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459호인 회양목이 이목을 끈다.
    재실은 제관의 휴식, 제수 장만, 제기 보관 등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부속 건물로 녕릉재실은 1659년 경기도 양주군(현 경기도 구리시)에 능 조성시 인근에 건립됐으나, 1673년 녕릉을 천릉하면서 현 위치로 옮겨져 왔다.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수법에 있어서는 짜임새 있게 건립되었고 안향청(능에서 제례를 지낼 때 임금이 내려 준 축문과 향을 보관하던 곳), 제기고, 제실, 행랑채(대문포함) 등의 시설이 온전하게 보존돼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돼 있다.
    조선왕릉의 재실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대부분 멸실돼 그 일부만 남아 있으나, 이 곳은 조선시대 왕릉 재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보존돼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 효종대왕릉 주변의 경관들

    또, 나무의 황제라 불리는 800여년 됨직한 느티나무도 긴 세월의 흐름을 방문객에게 전하고 있다.
    효종대왕능(寧陵)으로 향하는 길은 걷기에 안성마춤이요, 주변의 느티나무, 향나무, 갈참나무, 쪽동백나무 등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재실과 효종대왕릉 중간 쯤에 이르면 좌측으로 세종대왕릉과 연결되는 700여 m의 산책로가 있는데, 산불방지를 위해 매년 11월 1일부터 그 다음해 5월 15일까지 임시 통제를 하고 있어 아쉬움이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정자각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정자각 양옆으로 수복방과 수라간이 잘 배치돼 있다.
    홍살문은 홍전문 혹은 홍문이라고도 불리며, 신성한 곳을 알리는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이다. 화살모양의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의미하며 나라의 위엄을 상징한다.
    능역의 들머리에 서 있는 홍살문은 제관들이 찾을 때 절을 하는 배위가 조성돼 있다. 홍살문에 도착한 제관은 배위에 절을 하고 정자각에 이르는데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돌길은 참도(참례하러 가는 길)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神道)라 하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
    수복방은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을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쳐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해 1977년에 원형대로 복원했다.
    수라간은 산릉제례 때 제사음식을 준비하던 곳으로 터만 남아있던 것을 2005년 7월 발굴조사해 2006년 복원했다.
    정자각에 이르면 뒷문을 통해 효종대왕릉이 일직선상으로 보이고, 정자각 우측방향으로 빗겨난 지점에 인선왕후의 능이 배치돼 있다.
    정자각은 제례 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사를 드리던 집으로 위에서 보면 건물이 “T"자 모양을 하고 있어 한자의 ”丁“자와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동쪽으로 진입해 서쪽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이 건물은 1673년 녕릉 천장(무덤을 옮김) 시에 함께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각 우측에 자리잡은 녕릉비(寧陵碑)는 본래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 동구릉)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1673년(현종14)에 이 곳으로 천장한 사실과 그 후(1674년) 인선왕후의 능을 앞쪽에 따로 모셨음을 기록한 석비로서 비각과 함께 그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를 만나다


    세종대왕릉이 합장릉인 점과는 달리 효종대왕의 능은 상단 좌측에 위치하고 인선왕후의 능은 아래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정자각의 좌측으로 능침에 이르는 길로 오르면, 먼저 인선왕후의 능을 만날 수 있으며, 40여m 뒤로 효종대왕릉에 다다른다.
    인선왕후의 능과 효종대왕의 능에 공통적으로 석물이 배치되어 있는데 무인석 2개, 문인석 2개가 굳건하게 능을 지키고 있다.
    또, 해태4마리와 양4마리 그리고 말4마리가 능 주위를 둘러싸며 호위하고 있고, 장명등과 석상(혼유석,고석), 망주석도 잘 배치돼 있으며, 능침둘레(난간석, 병풍석)에 일정한 간격(정북향에 子로 시작해 동쪽방향으로 이동)으로 적어 놓은 12간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한자가 풍수지리와 음양오행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효종대왕릉 뒤편에서 앞쪽 방향으로 바라다 보면 가까이는 인선왕후능과 정자각 멀리는 북성산 봉우리가 환하게 펼쳐진다.
    관람을 마치고 입구를 나서면 주차장내에 있는 약수가 관람객의 갈증을 풀어준다. 동절기에는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약수물을 잠가 물맛을 볼 수 없지만 날씨가 풀리면 약수물을 뜨러 오는 사람들로 효종대왕릉 주차장은 북적거린다. 물맛이 시원하고 수질관리도 잘 되어 있어 지역주민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도 즐겨 찾는다.
    ◆ 효종과 효종대왕릉(寧陵)의 내력


    효종은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와 함께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 고초를 겪었는데 당시 조선왕조가 당한 굴욕은 씻을 수 없는 민족의 한으로 생각했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이 수치를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해 대내적으로는 대동법을 실시하고 화폐를 널리 보급해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바탕으로 북벌계획을 추진해 성채를 쌓고 총수병을 양성해 국방력을 강화했다.
    이 즈음 러시아가 시베리아쪽으로 남진하자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왕은 조선군대의 능력을 시험하고 청나라의 군사정세를 탐지하고자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 원정군을 보내 송화강(쑹화강), 흑룡강(헤이룽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했다.
    그러나 북벌계획을 실천에 옮기지도 전에 갑자기 승하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녕릉(寧陵)은 원래 경기도 양주(지금의 구리시)의 건원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현종14년(1673)에 여주로 옮겨왔으며, 효종의 북벌웅지를 기리고자 1977년 경역을 정비했다.
    인선왕후(1618~1674)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있을 때 현종을 낳았으며 귀국한 후 1649년(인조27)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됐다.
    ◆ 효종대왕의 인간관


    우암 송시열(1607~1689)은 효종의 묘지문에서 의리의 군주 효종을 “오직 자신의 마음을 극진히 하고 자신이 할 일을 삼가면서 항상 ‘갈 길은 먼데 해는 저물어간다’는 탄식을 했다. 또 탄신하며 이르기를, ”옛날에 ‘마음을 같이 하는 신하가 한둘만 되어도 도움이 된다.’했는데 지금은 너나없이 덩달아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라며 의리의 군주 효종을 회상했다.
    북벌은 인조의 정치적 후계자였던 효종이 힘들지만 가야만 했던 외길이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인조와 형 소현세자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당한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림)의 치욕을 씻는 길은 오직 불벌이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생각이 좀 달랐다. 굴욕적일지 모르지만 효종보다 개방적이고 전향적이었다. 변화하고 발전하는 청의 모습을 보며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소현세자는 8년 동안 심양에 있으면서 아담 샬과 같은 인사와 교류했고, 서구의 신문물과 그것의 통로가 됐던 청나라에 호의적이었다.
    나중 효종의 뜻과 완전히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에 대한 효종의 의리와 둘의 관계는 살갑고 끈끈했다. 효종실록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돌아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소현세자에 대한 효종의 의리는 계속됐다. 북벌의 의지를 천명하고 오직 그것에 전념했던 타락, 죽은 소현세자와 죄인이 된 형수 강빈과 조카들에 대한 효종의 호의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던 때다.
    ◆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는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519년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겨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히 보존됐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 영릉(세종대왕릉)과 녕릉(효종대왕릉) 관람안내


    영릉(英陵,세종대왕릉)과 녕릉(寧陵,효종대왕릉)관람시간은 하절기(3월~10월)에는 오전9시부터 오후6시30분, 동절기(11월~2월)에는 오전9시부터 오후5시30분까지 관람(매주 월요일은 정기휴일)할 수 있으며, 관람소요시간은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까지 약1시간 30분 걸린다.
    관람요금(효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 동시관람 가능)은 대인(19세~64세) 500원(단체 20인 이상 400원)이고, 소인(7세~18세) 300원(단체10인 이상 200원)이며 6세이하 어린이 또는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 국가유공자 등은 무료관람대상자다.
    문화유적해설을 원하는 분은 사전예약(031-887-2868)할 수 있고, 기타 자세한 사항은 세종대왕유적관리소(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 031-885-3123~4)으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여주=박근출 기자pkc@simin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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