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6-02 17:38:28
    • 카카오톡 보내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2) 銃대 멘 젊은 ‘괸당'들

    옳거니, 그 소리 나올줄 알았지! 자신들은 ‘공포의 입’을 갖고 있지만, 내가 갖고 있는 ‘공포의 붓’은 갖고 있지 못하니까. 우열(優劣)을 가리자면 ‘막상막하’가 아니라 붓이 승리할 걸 아마! 그래서 붓을 탐내게 되었고, 그걸 손아귀에 넣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속셈 모를 줄 알고…? 하지만, 이러땐 시치미 뚝떼고 오리발 내미는게 상책이겠지…?

    “비장의 무기라뇨? 그런거 갖고 있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요. 앞으로 가급적 두 형님의 뒤를 따라야 겠다는 생각외엔 감춰놓은 계획 같은 것 전혀 없다구요. 혼자서 은밀히 써먹을 수 있는 밑천이란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만성은 기이한 돌출발언의 뿌리를 캘 생각은 하지도 않고, 주눅이 든 듯 횡설수설 얼버무리며 꽁무니 빼기에 바빴다.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면서….

    “그냥 해 본 소리 갖고 과민반응을…. 신경쓰지 말게. 그런데, 자네 책장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꽂혀 있긴 하지만, 어찐 된 일인지 내가 갖고 있는 책은 한권도 구경할 수 가 없어서 실망이 크지 않을 수 없네. 혹시 갖고는 있어도 깊숙이 감춰버린건 아닌가? 무슨 책이냐면… 말보다 실물을 보여줘야겠군! 바로 이 책일세”

    고정관은 자신의 웃저고리 안 호주머니를 뒤적거린 끝에, 두툼한 책 한권을 끄집어냈다. 이만성의 눈이 왕방울처럼 휘둥그래졌다. ‘新資本論’-카와카미하지메(河上肇)라는 일본 좌익계 경제학자의 저서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물을 대하긴 처음이었다.

    고정관과 조용석의 차가운 눈초리는 강렬하게 이만성의 얼굴을 짓이기고 있었다. 이만성은 군침을 삼키며 한참동안 책위에 시선을 떨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모처럼 찾아온 내방(來訪)목적이…(河上肇)의 저서 ‘新資本論’-그렇잖아도 진작부터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긴 했다.

    “이런 귀중한 책을 형님은 벌써부터 갖고 계셨군요. 저는 구할 수가 없어서 갖고 있지 못합니다. 갖고있다면 왜 감췄겠습니까?”

    이만성은 대견스럽다는 뜻으로 고개를 꾸벅거렸다.

    “보나마나 자네도 갖고 있겠지 하면서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한답시고 갖고 나왔던 걸세, 반가워하는 것 보니 기쁘네. 한번 읽어보게!”

    고정관은 흐뭇해하면서 비싸게 노는 기분을 감출 수 없어 어깨를 으쓱거렸다.

    “형님은 일본의 명문사립 K大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잖아. 경제학을 하는 사람은 좌와 우를 떠나서 모든 경제학을 섭렵(涉獵)해야 하듯이, 정치학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형님은 아마 이책을 따르르 외고 있을 걸!”

    조용석이 신바람이 나서 싸구려 약파는 장사꾼처럼 의몽스럽게 책선전을 늘어놓았다. 고정관이 철철 넘치는 술잔을 쭉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한번 읽어본 다음 모여 앉아서 토론을 하기로 하세. 재미있는 내용이더군! 모르긴 해도 자네도 첫 페이지 읽으면 끝까지 단숨에 안 읽고 못 배길걸? 돈을 주고도 조선땅에서는 구하기 어렵지않나 싶네, 빌려주는거니까 그리알고 읽고 나서 돌려줘야 해. 나의 재산목록 아니 도서목록 제 1호니까. 하하하”

    “잘 알겠습니다. 떼어먹지 않고 돌려드릴게요”

    “좋았어. 이자는 안 받을테니 원금만 갚으면 될까”

    이만성은 얼른 책을 집어들고 잠시 망설인 끝에 책상서랍 안으로 깊숙이 감춰버리는 것이었다.

    “에또, 긴히 아우님께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텐가?”

    “네, 뭔데요? 형님답지 않게 왜 망설이고 그러세요? 뜸 들이지말고 어서 말씀해 보세요!”

    “운천동의 ‘진명의숙’에서 야학을 시작했다는 말 들었네, 우리 ‘영재의숙’에서도 시작은 했네만,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서…. 중학과정을 신설해야겠는데, 국어와 영어는 자네가 맡아줬으면 하고, 부탁하자는 걸세!”

    “아, 그래요? 미군도 주둔했고, 기초영어쯤은 서두는 편이 좋겠지요. 자신은 없지만 힘 닿는 데까지 협조해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1주일에 2번은 나와줘야 될 터인데…”

    “진명의숙에 2번 나가고 있어요. 시간표만 정해주시면 2번 나가는 건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럼, 월요일과 목요일이 좋을 것 같네만…”

    “알겠지? 한데 형님 벌써 6시(18시)가 지났네요. 그만 작별해야잖겠어요? 앞으론 영재의숙에서 만나기로 하구!”

    조용석이 비틀거리며 먼저 일어났다. 이만성으로부터 동구밖까지 배웅을 받고, 두사람은 자전거를 끌며 거추장스런 발걸음으로 달미동을 떠났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