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6-03 16:48:13
    • 카카오톡 보내기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13) 銃대 멘 젊은 ‘괸당'들

    문중회에 급한 볼일이 있어 제주성내를 다녀와야겠다면서 집을 떠났던 이양국(李陽國=46)은 3일후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왔다. 고정관과 조용석이 다녀간 다음 다음날인 셈이었다.

    “아버님이 떠나시던 이튿날 고정관-조용석 두 선배님 다녀갔습니다. 모처럼 아버님을 뵙고 싶었던 모양인데, 계시지 않아서 몹시 섭섭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래 일은 잘 보시고 오셨나요?”

    아버지의 엄숙한 기침소리를 듣고 대문 앞까지 달려나간 이만성은 얼마나 조급했던지, 아버지가 채 방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서둘러 경과보고를 했다.

    “그래? 무척 보고싶은 얼굴들이었는데, 섭섭하긴 피차 매일반이지 뭐냐. 오랜만에 죽마고우들, 아니 선배들을 만났으니 무척 반가웠겠구나! 좋은 얘기 많이 나눴겠지? 보나마나…”

    이양국은 근엄한 얼굴에 발그무레하니 웃음짓고 있었다.

    “두시간 가까이 술자리를 베풀었었지요. 아버님의 지시대로 푸짐하게 술상을 차렸더랬습니다. 꽤나 어리둥절한 눈치들이던데요. 많은 얘기를 나눈 끝에, 야학강사로 나와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해습니다만…”

    “뭐? 야학강사…?”

    뜻밖이라는 듯 이양국은 정색을 하며 눈빛을 빛냈다.

    “영재의숙에서 중학과정의 야학을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1주일에 두 번 국어와 영어를 맡아달라지 뭡니까”

    “그래서…?”

    “좋다고 수락을 했습니다. 괜찮을 것 같아서 아버님 승낙도 안 받고…죄송합니다.”

    “죄송할게 뭐 있냐. 잘 했다.

    선배들의 부탁이기도 했지만, 설령 싫어도 거절할 입장은 아니지 않느냐? 영재의숙 출신의 동문이라는 점도 있지만, 그 두사람은 괄시못할 대상이잖아?

    조선이 낳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일제로부터 풀려난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떤 모양으로 자리를 잡고 일어서게 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고군과 조군은 동량지재(棟梁之材)로서 온 나라를 주름잡고도 남을 일꾼들이라고 이 아비는 보고 있다. 한층 더 두사람과 각별한 유대관계를 이어나가도록 했으면 좋을 것 같구나!”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아버님 말씀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조국의 앞날이 부디 두선배의 됨됨이를 높이 사서, 나라에 공헌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왠지 불안감과 불길감이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것만 같아서, 그게 좀 꺼림직하지 뭡니까”

    “불안감과 불길감…? 너무 인물이 출중해놔서 그게 화근이 될 것 같다는 얘기냐?”

    이양국은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아들의 옆모습을 미심쩍게 ?어보는 것이었다.

    “별건 아닙니다만, 사실은 아버님이 돌아오시기를 애타게 기다렸었습니다.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이만성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한권의 책을 아버지의 무릎 밑으로 조심스럽게 내려 놓았다. 고정관으로부터 받은 문제의 ‘新資本論’이었다.

    물끄러미 책을 내려다보는 아버지의 눈이 어둠속의 고양이 눈깔처럼 크게 부풀며 차갑게 버뜩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한, 색깔이 진한 좌익서적이더군요.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끝까지 통독을 해 보았습니다. 프롤레타리아라든가 소작농민들에게는 벌꿀보다 달콤한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던데요”

    이만성은 느낀대로 숨김없이 독후감을 아버지 앞에 털어놓았다.

    “카와카미 하지메, 그 사람은 일본의 좌익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우상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는, 특출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이 아비도 알만큼 알고 있단다. 이미 고군과 조군의 머릿속엔 뭐가 가득 들어있는지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구나! 설마 했었는데 그토록 성급할 수가…”

    이양국은 핼쑥해진 얼굴로 꺼지는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려니 하고는 있었지만 저 정도로 아버지가 실망하시 줄이야…. 이만성은 눈앞이 캄캄했다.

    “저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절대로 현혹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께서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치학쪽은 백지이지만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저도 알만큼 알고 있으니까요”

    이만성은 추호도 동요하고 있지 않다는 자신의 입장을 아들의 명예를 걸고 아버지 앞에 밝혔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시민일보 시민일보

    기자의 인기기사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