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하소설 황제의 싸움터

    칼럼 / 시민일보 / 2003-06-23 19: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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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제주 4.3 民亂
    (9) 웅변왕, 그 공포의 입

    유서깊은 사장터를 바라보며 세사람은 국민학교 서쪽 울타리를 낀 널따란 길목으로 들어섰다. 시골학교치고는 건물도 크고 운동장도 넓어보엿다. 한남 1∼2마을과 도선마을을 중심으로 5개 마을이 학구(學區)로 되어있는 학교였다.

    세사람은 학교 정문앞을 지나 곧 도선마을 어귀안으로 빨려들어갔다.

    6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답게,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굵직굵직한 돌담울타리 안에 크고작은 초가집들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질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어느집 할 것없이 돌담 울타리 안에는 밀감나무, 감나무, 유자나무, 밤나무, 팽나무, 동백나무 등등 갖가지 아름드리 나무들이 숲을 이루었기에 모든 초가집들은 두겹세겹으로 둘러싸인 철통같은 방위벽 안에 도사리고 앉은 셈이었다. 마치 거대한 밀림지대를 고스란히 옮겨다놓은 듯 장엄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을이었다.

    겉모습이 그래서인지 거미줄처럼 요리조리 얽히고 설킨 마을길은 미로(迷路)를 떠올릴 정도로, 음산하고 까다로운 곡선(曲線)의 연속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석은 능숙한 길잡이답게 이리꺾고 저리 돌고 하면서, 곡예하듯 마을안을 누비다 어떤 조그마한 집 대문안으로 껑충 뛰어들었다.

    고정관과 조용석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엉거주춤 멈춰서고 말았다.

    “어이, 김순익 집에 있나? 한남마을 이현석 형님께서 오셨다네, 얼른 뛰어나오라니까. 형님뿐만 아니라 귀하신 손님들이 천리길도 멀다 않고 행차하셨어. 뭘 꾸물대고 있나 어서나왔!”

    이현석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으름장 놓듯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러나 태풍전야의 고요처럼 집구석은 너무도 고즈넉하다. 문틈으로 내다보며 확인하느라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일까? 이현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한번 외쳐대려고 목구멍을 가다듬고 있을 때였다.

    젊은 여인이 탐색의 눈을 번뜩이며 부엌안에서 기웃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현석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황급히 부엌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꾸벅했다.

    “안녕하셨어요, 제수씨! 김순익 동생 좀 만나보려고 왔는데…. 9시가 가 되었는데도 그사람 늦잠자고 있을리는 없고…. 잠깐 나와보라고 하세요!”

    이현석은 반색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제수씨 어쩌고 하면서 야비할 정도로 달라붙고 있었다.

    “아니, 현석씨가 웬일이세요? 우리 그이 지금 집에 안 계신데요. 무슨일로 그러세요?”

    겉으로 선 웃음을 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우리 한남마을에서 두분 선배님을 모시고 왔거든요. 아우님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해서 제가 함께….

    만나뵈면 잘 알 수 있을거요. 어욱이 고정관 선배님은 동양권에서 유명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치신 분이지요.

    작년에 도선학교 운동장에서 강연있었잖아요? 그때 도선마을이 떠나갈 정도로 열변을 토하셨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멈출줄을 몰랐었잖아요. 도선마을에선 젖먹이 어린애들도 고정관선생 오셨다고 하면 울다가도 울음을 뚝 멈출걸요. 자선배님들 들어오시지요!”

    이현석이 약장수 떠들어대듯 입에 게거품 물고 장광설을 늘어놓은 끝에 대문밖을 향해 선심이라도 쓰듯 투박하게 소리를 질렀다. 고정관과 조용석이 정색을 하고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아, 실례합니다. 고정관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조용석이구요. 김순익군과 영재의숙 동문들인셈이지요. 김숙인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불숙 찾아왔구만은”

    고정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방문이유를 밝혔다.

    “잠깐이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김순익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외출한 모양인데,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요”

    조용석은 무턱대고 버티기작전으로 맞서겠다는 뜻을 강하게 내비쳤다. 여인은 몹시 난감해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 끝에 “어려운 걸음들을 하셨는데, 잠깐 기다려 보시죠. 어른들께 여쭤보구요”

    이렇게 말하고 여인은 줄행랑 놓듯 황급히 부엌안으로 그림자를 감춰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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