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문종 경민대학 총장)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 때문인지 근래 들어 조문 기회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민심을 적나라하게 귀동냥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喪家의 공간적 의미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인에게는 여론의 바로미터의 제공처가 된다는 측면에서 정치활동의 주요무대가 될 만하다.
직업상(?) 상가를 많이 찾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 방면에 있어서 여느 상조 전문가 못지않은 일가견을 터득하고 있다.
親喪을 겪기도 했고 권문세가의 럭셔리한 장례부터 작은 시골 마을의 전통적인 상여 장례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발품을 판 결과다.
어느 정도의 안목이냐면 일단 상가에 가면 호상인지 악상인지부터 시작해서 가족 간의 친밀도, 경제적 수준, 사회적 참여정도 그리고 고인의 생전 관심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정도이니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늘상 느끼는 바지만 우리의 전통적 장례문화는 개선의 여지가 많다.
우선은 과도한 장례비용 문제부터 짚어보겠다.
주위에서도 무지막지한 장례비 때문에 고생하는 유족들의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발표한 ‘장례문화 의식 및 실태조사‘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장례비 지출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거품이 낀 장례 물품이 부당하게 강매되는 '거래'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유족의 장례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일 것이다. 유족을 두번 울리는 장례식장의 고질적인 바가지 횡포에 대한 지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것 같다.
관이나 수의 등의 장례용품이나, 문상객 접대 음식비용이 외부업체에 비해 평균 2배에 달하지만 유족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없는 사람은 장례도 못치루겠다는 비명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허례허식과 형식적인 절차가 주도하는 우리의 조문 문화 역시 문제다.
귀한 시간을 내서 조문해 준 문상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으로 상주의 역할이 끝나는 건 아니다.
정해진 형식에 따라 뒤처리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는 지인의 하소연도 남의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베푸는 것으로 끝나야 할 유족 위로가 그야말로 부채의식을 남기는 거래로 왜곡되는 조문 현장이다.
반면에 미국의 장례식은 고인과 직접적으로 관계돼 있는 50명 안팎에 지인들이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고 더 나아가 남아있는 사람들의 진지한 삶의 방식을 다짐하는 역사의 장으로 승화되는 모습이다.
우리의 조문 문화와 달라서 부조금을 접수하는 일도 볼 수 없다.
그저 입구에 놓여진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상주와 악수나 허그, 또는 기도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보편적인 문상의 풍경이다.
뜻이 있는 지인의 경우, 고인이 생전에 가치를 두었던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고인의 이름으로 자선단체나 사회 봉사단체 같은 곳에 기부를 하면 된다.
이렇듯 삶과 인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장례식 본연의 의미를 살리고 있는 미국의 장례 문화를 벤치마킹 하면 좋겠다.
물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장례 준비에 십시일반 부조로 힘을 더하는 것은 미풍양속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부조금은 강요된 부채행위의 일환이거나 부담감을 주는 존재가 된 지 실로 오래라는 점에서 제고의 여지가 없다.
弔花의 문제점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조문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며칠 전 조문 갔던 한 저명인사의 상가에서는 리본만 떼어 상가 전체를 빙빙 두르고도 공간이 부족해 남의 상가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는 나 역시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다)
어느 순간부터 애도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조화행렬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저런 인연으로 소요되는 조화의 연간 비용을 따져보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금액이 산출되는데 이는 나 한사람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조화말고 (관련 업종에 계신 분들은 뭐라고 하시겠지만) 꽃 없이 리본만으로 애도를 표하는 장례문화가 정착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조문객이 많고 조화가 많은들 고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해에 여의도 면적 몇 배가 묘지화 되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지금 같은 가족형태가 지속된다면 산소를 돌볼 여건도 소멸될 것이다.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지금 목격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학교 뒷동산에 예전에 정승이나 장관을 지낸 분들의 묘가 여러 기 있는데 지금은 찾는 후손이 없어 방치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매장보다는 화장이 국민 장례방식으로 정착된 점이다.
이는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에서도 확인된 바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8년 화장률은 61.9%를 기록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20%를 넘지 못했던 수치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변화라 할 수 있겠다.
화장 문화 확산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SK그룹의 고 최종현 회장이다. 그가 자신을 화장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실제로 화장장을 치룬 이후 화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변화했던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나라 장례문화 발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인의 공로는 지대했다.
게다가 최근 SK그룹이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총 500억원 규모의 화장시설을 충남 연기군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조성했다는 소식이 반갑게 들린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방식을 거스르고 앞서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일반인보다 사회적 명사들의 경우 그 울림이 더 크다.
최근 현직 대통령 큰 누님의 장례식이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시이긴 했지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고 최종현 회장처럼) 사회적 저명인사들이 앞서간 의식으로 합리적인 장례문화 개선에 앞장서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자극하는 아주 큰 힘이 된다.
생각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간소하고 검소하고 합리적으로 치러지는 장례문화로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 문화를 숙성시키자. 나도 여러분도 모두가 주인으로 동참해서 만드는 문화 말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적 특성 때문인지 근래 들어 조문 기회가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이 세상 모든 민심을 적나라하게 귀동냥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喪家의 공간적 의미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치인에게는 여론의 바로미터의 제공처가 된다는 측면에서 정치활동의 주요무대가 될 만하다.
직업상(?) 상가를 많이 찾아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 방면에 있어서 여느 상조 전문가 못지않은 일가견을 터득하고 있다.
親喪을 겪기도 했고 권문세가의 럭셔리한 장례부터 작은 시골 마을의 전통적인 상여 장례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발품을 판 결과다.
어느 정도의 안목이냐면 일단 상가에 가면 호상인지 악상인지부터 시작해서 가족 간의 친밀도, 경제적 수준, 사회적 참여정도 그리고 고인의 생전 관심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정도이니 상당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늘상 느끼는 바지만 우리의 전통적 장례문화는 개선의 여지가 많다.
우선은 과도한 장례비용 문제부터 짚어보겠다.
주위에서도 무지막지한 장례비 때문에 고생하는 유족들의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최근 한국소비자보호원에서 발표한 ‘장례문화 의식 및 실태조사‘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이 ‘장례비 지출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거품이 낀 장례 물품이 부당하게 강매되는 '거래'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유족의 장례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일 것이다. 유족을 두번 울리는 장례식장의 고질적인 바가지 횡포에 대한 지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것 같다.
관이나 수의 등의 장례용품이나, 문상객 접대 음식비용이 외부업체에 비해 평균 2배에 달하지만 유족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제 없는 사람은 장례도 못치루겠다는 비명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허례허식과 형식적인 절차가 주도하는 우리의 조문 문화 역시 문제다.
귀한 시간을 내서 조문해 준 문상객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는 것으로 상주의 역할이 끝나는 건 아니다.
정해진 형식에 따라 뒤처리하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서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는 지인의 하소연도 남의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베푸는 것으로 끝나야 할 유족 위로가 그야말로 부채의식을 남기는 거래로 왜곡되는 조문 현장이다.
반면에 미국의 장례식은 고인과 직접적으로 관계돼 있는 50명 안팎에 지인들이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고 더 나아가 남아있는 사람들의 진지한 삶의 방식을 다짐하는 역사의 장으로 승화되는 모습이다.
우리의 조문 문화와 달라서 부조금을 접수하는 일도 볼 수 없다.
그저 입구에 놓여진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상주와 악수나 허그, 또는 기도로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보편적인 문상의 풍경이다.
뜻이 있는 지인의 경우, 고인이 생전에 가치를 두었던 일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고인의 이름으로 자선단체나 사회 봉사단체 같은 곳에 기부를 하면 된다.
이렇듯 삶과 인간, 그리고 죽음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장례식 본연의 의미를 살리고 있는 미국의 장례 문화를 벤치마킹 하면 좋겠다.
물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장례 준비에 십시일반 부조로 힘을 더하는 것은 미풍양속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부조금은 강요된 부채행위의 일환이거나 부담감을 주는 존재가 된 지 실로 오래라는 점에서 제고의 여지가 없다.
弔花의 문제점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조문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며칠 전 조문 갔던 한 저명인사의 상가에서는 리본만 떼어 상가 전체를 빙빙 두르고도 공간이 부족해 남의 상가까지 침범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는 나 역시 반성해야 할 부분이 많다)
어느 순간부터 애도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 조화행렬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런 저런 인연으로 소요되는 조화의 연간 비용을 따져보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금액이 산출되는데 이는 나 한사람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제는 조화말고 (관련 업종에 계신 분들은 뭐라고 하시겠지만) 꽃 없이 리본만으로 애도를 표하는 장례문화가 정착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조문객이 많고 조화가 많은들 고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 해에 여의도 면적 몇 배가 묘지화 되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지금 같은 가족형태가 지속된다면 산소를 돌볼 여건도 소멸될 것이다.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모습을 지금 목격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학교 뒷동산에 예전에 정승이나 장관을 지낸 분들의 묘가 여러 기 있는데 지금은 찾는 후손이 없어 방치되고 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매장보다는 화장이 국민 장례방식으로 정착된 점이다.
이는 정부의 공식 통계자료에서도 확인된 바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8년 화장률은 61.9%를 기록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20%를 넘지 못했던 수치에 비하면 괄목할만한 변화라 할 수 있겠다.
화장 문화 확산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SK그룹의 고 최종현 회장이다. 그가 자신을 화장시켜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실제로 화장장을 치룬 이후 화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변화했던 경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나라 장례문화 발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인의 공로는 지대했다.
게다가 최근 SK그룹이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총 500억원 규모의 화장시설을 충남 연기군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조성했다는 소식이 반갑게 들린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방식을 거스르고 앞서 나간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일반인보다 사회적 명사들의 경우 그 울림이 더 크다.
최근 현직 대통령 큰 누님의 장례식이 조촐하고 검소하게 치러졌다고 한다.
대통령의 지시이긴 했지만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고 최종현 회장처럼) 사회적 저명인사들이 앞서간 의식으로 합리적인 장례문화 개선에 앞장서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실행할 수 있는 용기를 자극하는 아주 큰 힘이 된다.
생각보다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간소하고 검소하고 합리적으로 치러지는 장례문화로 우리가 지향하는 21세기 문화를 숙성시키자. 나도 여러분도 모두가 주인으로 동참해서 만드는 문화 말이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