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명 교수]숙청의 제물(祭物)로 사라진 장성택 과 장칭

    칼럼 / 전지명 / 2013-12-15 13: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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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지명 동국대 겸임교수
    ▲ 전지명 동국대 겸임교수
    베이징에 위치한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도 유명했던 ‘이화원’ 근처 숲 속으로 백여 명의 소학교 아이들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소풍을 간다.

    인솔교사는 호루라기를 크게 불어 아이들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고 앙상한 겨울 나무 밑둥에 그림 몇 개를 기대놓는다.

    그 그림에는 숙청의 피바람이 휘몰아친 문화대혁명(1966~1976년)을 주도한 ‘사인방(장칭,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풍자 비판하는 내용의 만화를 그려 놓았는데, 쥐새끼도 등장하고 있었다. 교사 한 명이 앞으로 나서 아이들에게 쥐새끼로 그려져 있는 인물이 지은 죄상을 낱낱이 설명해 준다.

    그러자 아이들이 각자 메고 온 가방에서 돌맹이와 흙이 가득 든 종이 봉지를 꺼내 그 쥐새끼 그림을 향해 힘껏 던졌고, 그 봉지가 쥐새끼에 맞을 때마다 기뻐 환호성을 질렀다.

    그 쥐새끼는 바로 내일이면 서태후 다음으로 여자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칭송받던 마오쩌둥(毛澤東)의 네 번째 부인 장칭(江靑)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칭송했던 사람들조차 그녀를 쥐새끼로 묘사했다. 심지어 ‘서유기’에서 삼장법사를 현혹했던 요괴인 ‘백골정(白骨精)이란 별명도 마구 갖다 붙였다.

    중국 대륙을 통치한 붉은 별(마오쩌둥)의 미망인으로 섭정(攝政)지위에 있었던 장칭, 그 대륙의 별이 지고(장례식) 열 여드레 만에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의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에 의해 숙청을 당한다. 이때 훗날 화궈펑 뒤를 이어 국가 주석이 된 덩샤오핑(鄧小平)도 호시탐탐 최고 권력의 기회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 대륙권력의 2인자 에서 졸지에 반혁명 죄인으로 추락한 그 녀, 새장처럼 만든 피고석에서 “나는 마오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물었다.”고 항변하며 자신에게 씌워진 범죄혐의를 애써 부인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공산국가의 재판에서 모든 피고는 죄가 있던 없던 애당초부터 유죄이다. 이를 자신이 저지른 과거 경험에 비추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그녀는 '무죄다'라고 불필요한 싸움을 벌였지만, 예정된 각본 수순대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래서 권력투쟁의 패배자는 역사의 죄인이 되는가 보다.
    선악(善惡)을 뒤집어 놓은 ‘10년 대재앙, 피의 숙청'이라고 부른 문화대혁명의 지휘자였던 그녀는 끝내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두 해 전 평양의 하늘.
    눈발이 간간히 흩날리고 ‘영원한 태양의 집’이라고 불러지는 금수산 기념궁전 앞, 침묵이 깔린 광장을 서서히 지나고 있는 최고급 리무진 링컨 컨티넨탈.

    37년 절대 권력자의 시신을 실은 그 리무진 운구차량을 어루만지면서 울먹이고 있는 검정색 오버코트 차림의 후계자, 바로 그 뒤에 서 있는 매제(妹弟) 장성택도 후계자인 처조카와 함께 눈을 맞으며 비통한 표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비감한 심회에 젖은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광장에 울려 퍼지고 있는 구슬픈 장송곡을 귀에 담으면서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점쳐 보았을까.

    설마 고인을 위한 그 처연한 소리가 불길한 징조를 예고한다고는 미처 깨닫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검은 장막뒤에 숨겨진 무서운 정치음모가 그때부터 꾸며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두어 해가 흐른 오늘. 평양 권력의 명실상부한 제2인자 장성택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국 확대 회의장, 자기 눈빛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평소에 쓰지 않던 금테 안경을 쓴 조카와 당 간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는 '역모를 꾀한 자'로 낙인이 찍혀 양팔이 잡힌 채로 끌려 나갔다. 어디 감히 조카의 권위에 도전 하는 반역을 하다니, 목덜미를 잡힌 사냥감이 체념하듯 고개를 떨어뜨리고 아무 말 없이 잡혀가는 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최고의 권세를 누려왔던 권력 2인자에서 하루아침에 만고역적(萬古逆賊)으로 전락한 그의 운명, 다시 말해 체념한 듯 한 그의 침묵과 무표정은 ‘피의 숙청’으로 얼룩진 북한 역사의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어쩌면 그는 ‘정치적 후견인’이자 고모부인 자신의 등에만은 결코 숙청의 칼을 꽂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끌려 나간 지 나흘 만에 수갑이 채워진 채 붙들려 나온 그는 그토록 믿고 싶었던 그 조카에 의해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그도 과거 문화대혁명 당시 숙청을 주도했던 '장칭'처럼, 당 간부들과 가족 등 무려 2만5천여 명의 반대파를 가차 없이 처단한 이른바 ‘심화조 사건’ 숙청작업의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장칭과 장성택.

    그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정치적 운명은 비슷했다.

    잔인한 숙청을 자행한 그들도 결국 그와 똑같은 숙청에 의해 마침내 숙청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숙청의 악순환을 자초해 숙청 역사의 제물(祭物)이 된 그들이야 말로 그 역사의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인류의 큰 스승이다. 여기서 우리는 냉혹한 역사의 교훈을 얻어야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면 비극적 과오를 되풀이 할 것이다.
    피는 피를 부르고, 숙청은 숙청을 부른다는 역사적 진실 앞에 최고 권력자들은 누구나 겸허하게 겸손을 배워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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